영광군민들의 역량강화와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진행하는 영광 미래 리더스 아카데미가 영광신문 지면을 통해 찾아왔다. <편집자 주>

 

영광미래리더스아카데미 제주 다크투어편 (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과 일제 지하벙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일대에 위치한 옛 비행장. 현지 지명을 따서 모슬포비행장이라고도 불린다.

'아랫쪽'을 뜻하는 제주어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 '드르'가 합쳐진 말이다. , 제주도 아랫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2020)에 제주국제공항, 정석비행장과 같이 제주도의 세 공항 중 한곳으로 등장한다.

1933년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임시활주로 형식으로 최초 조성됐으며 당시 규모는 60,242평이었고 활주로는 1400m×70m 였다.

1937147258평을 추가 매입하여 확장. 1차 완공 당시 규모가 약 20만 평에 이를 정도로 넓어졌다.

1937년 상하이 전투 당시 일본 해군의 95식 육상공격기(G2H1) 6대와 96식 육상공격기(G3M) 6대가 폭격거점으로 사용했다. 즉 중일전쟁 당시 중국으로 향하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알뜨르 비행장이다. 덕분에 알뜨르 비행장이 중국이 국가적으로 가장 치를 떠는 난징 대학살의 배후거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45년부터 일본 해군 901 항공대가 전진기지로 사용하였으며, 19441119일 일본 해군 931 항공대. 파견대도 오로쿠비행장(현 나하 공항)에서 이동, 1945410일까지 동중국해 대잠작전 거점으로 사용했다.

확장을 거듭해서 해방 시점엔 약 80만평에 달했으나 땅만 넓다 뿐이지 전쟁 말기의 모자란 자원과 지역 주민 강제 동원이란 비효율적 방식으로 비행장은 물론 지하갱도 공사까지 하였고, 나중엔 그 모자라는 자재나 인력도 결전기지 공사에 쓰다보니 완공도 못한 채 패망하게 된다.

한편, 대부분 일본 측 자료라 100% 확신하긴 어렵지만 카미카제 기지로 쓰이기 위한 결전기지 공사를 비행장 부근 해안가에 하긴 했는데 알려진 것과 달리 신요 보트 기지로 쓰였다. 제주도에는 리타 중폭격기를 포함해 비교적 정상적인 항공 병력이 주둔 중이었고 항공 자폭 기지는 김해공항같은 육지공항이었다고 한다. 대신 만약 결전작전이 진행되는 최악의 상황이 왔다면 거점기지로 쓰였을 가능성은 높다.

현재 대부분의 땅이 농지화되는 등 규모가 축소되고 길이 약 1200m, 250~260m의 착륙대와 주기장 등 일부 시설 잔해와 이십여개의 콘크리트 격납고가 남아있다. 격납고들은 한때 농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창고처럼 사용되었고 지금은 대개 그 안이 비어 있다. 그중 하나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로 철근으로 제작한 제로 전투기의 모형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제주 도민의 소중한 식량을 만들던 너른뜰이 군사 공항이 되고,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지하벙커와 비행장 경납고의 모습을 보면서 만일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제주를 공격했다면 사이판, 괌 등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처럼 우리에게도 또 다른 큰 피해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서늘함이 느껴졌다.

 

 

 

만벵듸 영령 희생터

명월 상동 갯거리오름 서남쪽에는 1950년 음력 77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민간인들을 매장한 '만벵듸 공동장지'가 있다. 같은 날 희생된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와는 다른 구덩이에서, 다른 시간에 학살된 만벵듸 공동장지의 희생자는 한국전쟁 직후 한림 및 무릉지서에 검속되었던 사람들이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주로 한림 지역의 우익인사에서부터 유족들 표현대로 '농사밖에 모르던 농투성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 사람들이다.

현재 유족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이 사건의 희생자는 63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검속되기 시작했다. 검속은 희생된 전날(1950년 음 77, 820)까지 약 두 달 동안 이루어졌다. 이들의 구금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였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음력 77일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살됐다. 그날, 몇 시간 후에는 큰 구덩이에서 백조일손 희생자들이 학살됐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백조일손 희생자들은 트럭이 중간에 고장나는 바람에 한림지역 희생자보다 학살 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시신 수습은 1956330일 이루어졌다. 일부 유족들이 모여 군인들 몰래 칠성판이며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경에 트럭으로 섯알오름에 가서 수습해 왔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을 쉽게 구별했다고 한다.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는 것이다. 만벵듸 공동장지는 다행히 유족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유족들은 그 날, 매장을 하면서 서로 약속했다. 우리 앞으로 단 한 사람이 여기 벌초를 오더라도 '메도, 술도, 벌초도 같이 하자'.

현재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으로 묘역은 잘 정비되어 있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안에는 섯알오름 희생자 외에 원래 그 곳에 묻혔던 토지 주인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예비 검속과 보도 연맹으로 귀결되는 만벵듸 희생터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한국전쟁 전후 우리 민족을 찢어 놓은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닌가

재판도 없이, 확인 절차도 없이 살해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영광주민으로서 느끼는 아픔은 사뭇 남달랐다.

 

 

이번 제주 다크투어와 함께 영광미래리더스아카데미는 하반기 가을 여순사건의 유적지들을 답사하며 또 한번의 다크투어를 진행하고자 한다.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과거이겠지만, 화해와 조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은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영광 미래 리더스아카데미는 새로운 시대의 제안을 위해 깊은 고민과 숙려의 기회를 삼기 위해 올해 제주, 여순 다크투어를 진행한다.

 

/국형진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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