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 오승환 박사

영광군민들의 역량강화와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진행하는 영광 미래 리더스 아카데미가 영광신문 지면을 통해 찾아왔다. <편집자 주>

 

15강 맛있는 고고학(상)

 

음식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아시아에는 없는 분야이다. 유럽에서는 음식고고학이라 명명은 되어 있으나 연구 초기로서 현재 유튜브 오승환TV를 통해 활동하며 음식에 대한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여 우리의 삶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육식동물인가 초식동물인가?

육식동물이 채식동물이 된 사례도 없으며, 채식동물이 육식동물로 된 사례도 없다.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식동물의 눈은 머리의 옆에 달려있으며, 육식동물은 앞에 달려있다. 말의 눈가리개는 야생의 옆눈을 퇴화시키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 두 번째는 치아가 다른데 초식동물은 풀을 갈아 먹고. 육식동물은 고기를 뜯어서 삼키기 때문에 구조가 다르다.

하지만 인간은 치아를 보면 채식에 적합한 씹는 구조이다. 하지만 눈은 육식동물의 것을 갖고 있다. 이런 두 가지 기능은 한쪽의 강함으로 군림하지 못했다. 심지어 원시인은 육식동물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 단계부터 키가 크고 두뇌 용량이 커지면서 집단으로 사냥을 하면서 더욱 건강해지고,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드디어 불을 사용하게 된다. 이전의 인류는 초식동물이었기에 많은 양의 식물을 섭취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육식을 시작하면서 먹는 시간을 줄여 사냥을 하고, 도구를 만드는 시간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구석기 시대 벽화를 보면 비숑이라고 하는 동물을 했다는 것이며 그 증거가 기록을 남겼으며, 메머드의 멸종도 인류의 사냥으로 멸종했다는 설이 있다. 인류를 피해 빙하지역인 베링해까지 도망갔지만 인류가 이를 따라 이동했으며, 그 증거가 멕시코에서 발견된 수십구의 메머드 뼈에서 인류가 사용한 창의 흔적의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냥을 하던 인류는 고기를 해체해서 이동했는데 돌칼을 이용해서 현재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화강암을 사용하면 그 날카로움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기에 충분하다. 과거 인류의 유적지에 가보면 동물의 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이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 유물 사례와 비슷한데 사냥에 실패한 원시인의 저장 기술을 볼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저장기술은 큰 뼈로 수개월을 놔둬도 뼈속의 골수는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에 음식을 조리하면서 인류를 보면 초식동물이었던 유인원은 장이 초식동물처럼 길고, 육식을 시작한 인류는 장이 짧아지면서 오늘날의 인류로 발달하게 되었다.

 

왜 빗살무늬 토기는 뾰족했을까?

빗살무늬 토기는 저장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기존 학설이 일반화 되었다. 하지만 많이 담기 위해서는 넓은 장독처럼 커야하지 않을까? 심지어는 토기를 만들 당시에는 가볍고 유연하며 신축성도 높고 만들기도 쉬운 주머니를 함께 사용했다.

빗살무늬 토기와 자루 망태기 중 도토리를 담는다면 뭐가 더 많이 담길까?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는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보고 있으며, 그 가치도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껍질로 만든 망태는 쉽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빗살무늬토기가 액체를 담았을까? 아니다. 그것도 박으로 얼마든지 커버 가능하다.

빗살무늬 토기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는 소재이기에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뾰족할까? 땅에 박아놓기 위해 뾰족하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보면 돌로 받쳐서 토기를 세우고 바닥에서 띄워놓고 불을 놓아 불을 닿게 해야 조리를 했다는 것이다.

깨진 도기를 부여 놓으면 불을 아래에서 맞은 흔적이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빗살무늬 토기를 이용해서 복합 음식 (다양한 식재료를 넣고 끓여 먹는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토기 조각의 안쪽에 있는 음식을 분석해보니 버섯, 견과류, 도토리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식재료를 활용해서 음식을 조리해서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청동기 시대 토기를 보면 바닥이 평평한 토기가 만들어지는데 무문 토기를 보면 불이 직접 닿는 아랫부분은 덜 탄 것 같은 모양이 되고, 중간 윗부분은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2500년부터 3500년도 사이를 청동기 시대로 보고 있는데 그 당시 집안에서 토기 조각의 안쪽에서 좁쌀과 같은 곡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농사지은 곡식의 양이 많아졌을 뿐 신석기 시대의 복합 음식을 먹는 것은 여전히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목이 좁은 토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목이 좁은 항아리는 저장이라는 개념에 맞는 토기의 시작이다.

집안에서 사용할 때는 토기에 짚을 엮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끈을 묶어서 이동하도록 손잡이나 매달 수 있게 되었으며, 큰 항아리를 짚으로 묶은 이유도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이동을 위한 기능으로 확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손잡이가 있는 작은 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부뚜막이라는 개념이 시작하게 되는데, 그때 만들어진 토기가 시루이다. 이 시루로 밥을 짓고 작은 토기에는 반찬을 조리하면서 주식과 부식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잡탕으로 끓여 먹었던 청동기시대에서 주식과 부식으로 나눠진 시대를 보면 한번에 음식을 넣고 끓여서 먹는 편한 방법에서 주,부식으로 나눠지는 불편한 조리과정이 왜 생겼을까?

시루에는 밥 밖에 못 짓기 때문이다. 또한 복합 음식은 토기 표면이 많이 오염되어 미생물이 자라 귀한 토기가 상하게 된다. 하지만 시루에 헝겊을 넣고 곡식을 찌게 되면 귀한 토기의 오염을 막고 토기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백제사람들도 우유를 마셨다고?

백제토기에서 우유 성분이 확인된다. 대부분 백제토기가 사용된 시대에 춘천 중도 유적에서는 육상자원 (고기)의 비중이 높았으며, 광명 하학동 유적은 해양자원 (어류)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고대토기에서 우유를 가공했던 증거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독일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에서 소, , 염소 젓이 하나는 돼지 젖과 사람 젖 성분이 나왔는데 토기가 우유병으로 사용된 증거로 보고 있다. 이런 유제품 흔적이 있는 토기 조각은 어린아이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어린아이의 물건을 함께 묻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현재보다 엄청나게 높았을 것은 예상이 가능한데, 이런 병들이 발견되면서 유아사망률이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었다. 백제 토기에 산양의 젖을 짜서 우유병으로 먹여 유아의 영양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례처럼 우리도 산양 등 육식동물의 젖을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얼음을 저장했을까?

우리나라는 석빙고가 경상도 지역에 있으며 서울에도 동빙고, 서빙고 등으로 얼음을 저장하던 곳이 있다. 백제시대에도 얼음창고를 지었는데 한 채는 기와건물로 두채는 초가건물로 지었다. 이곳의 이름이 빈전이다. 우리가 사람이 돌아가시면 빈소에 간다고 하는 것처럼 같은 이름이다. 백제 무령왕이 돌아가시고 무령왕릉을 만들 때 부고를 전해야 하는데 일본, 중국 등의 나라에 이 소식을 전할 때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모아 내용을 만들고 글씨를 써서 이동해야 하는데 몇 달씩 시간이 걸렸는데, 부의품을 만들어서 몇 달에 걸쳐 또 백제로 가서 조문하게 되는데 그 기간이 1년을 넘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2년 동안 기다려야 하는데 얼음을 밑에 깔고 왕의 시신을 그곳에 보관했던 것이다.

타국의 사신들이 무령왕의 장례에 참여하는데 가야, 신라, 일본, 중국의 다양한 나라들의 유물이 발견되는데 고구려의 유물만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앙숙관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중에 엄선된 것들을 모아 무덤에 같이 묻게 되었다.

일본에서 백제와 가장 친했던 시대 친 백제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개인 집에 빙고를 몇 개를 만들었다더라 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조 아들이 너무 더위를 타자 아들을 위한 빙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겨울에 한강의 얼음을 조각내서 빙고에 보관해서 신하에게 얼음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사례에서도 여름에 얼음을 먹는 역사를 볼 수 있다.

 

/국형진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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