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집(11) 노벨상을 거절하다-사르트르

아무리 욕심이 없다 한들, 현재 지구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 노벨상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노벨상은 스웨덴의 화학자 노벨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1901년에 제정되었고,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경제학, 문학, 평화의 6개 부문에서 인류 문명의 발달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수여하는 최고의 상이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바로 그 상을 거절한 철학자가 있었다니.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1905~1980)인데, 일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1964년에 사르트르는 자서전적 소설을 썼고, 이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최고의 명예와 그에 수반되는 5만 달러(오늘날 시세로는 10억이 넘음)의 상금을 거부하였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 치우침으로써, 그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그러나 자신의 라이벌인 카뮈(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보다 늦게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불만을 품고 수상을 거부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그가 노벨상을 거절한 데에는 그의 소신과 철학 외에 특이한 성장 배경과 그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기질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르트르는 어렸을 적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부친은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짓밟히기 싫어하는 그의 기질은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친을 잃은 사르트르는 10살이 될 때까지 엄격한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외할아버지의 깊고 넓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나이 열한 살 때(1917), 모친이 어떤 공장장과 재혼을 함으로써 이 시기도 종말을 고한다. 그는 또다시 낯선 환경,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난히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까닭은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사르트르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멸시하였으며, 강의를 잘 듣지도 않았다. 또 단벌옷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녔으며, 주정뱅이로 보일만큼 술을 많이 마셨다.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자격 시험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년간 더 공부를 한 끝에 이듬해에는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하자, 사르트르는 즉시 독일군을 겨냥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다. 전쟁이 끝나고 조국 프랑스에 드골 정권이 들어서자 그 독재적 성격에 반대하며, 이번에도 사르트르는 반()정부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르트르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울 때는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까지도 걸었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반대하여 보봐르 부인과 계약결혼을 하였으며, 두 사람만의 자유를 위하여 자식을 갖지 않았다. 사유재산 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카페에서 작업을 하였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만약 우리가 철학자를 자기의 분명한 소신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상관없이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사르트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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