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 오승환 박사

영광군민들의 역량강화와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진행하는 영광 미래 리더스 아카데미가 영광신문 지면을 통해 찾아왔다. <편집자 주>

 

15강 맛있는 고고학(하)

 

 

숟가락이 휜 이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보면 대부분 숟가락이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숟가락과는 다른 모양을 한 이유가 있는데, 통일 신라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한 숟가락은 어쩌다 발견된 젓가락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사용된 유기그릇까지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로 당시의 엘리트의 유물인 것이다.

젓가락 없이 숟가락만 나오는 이유는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발견된 숟가락을 보게 되는데 이 유물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밥은 숟가락으로 반찬은 손으로 먹는다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비슷한 난파선인 신안선에서는 젓가락이 발견되는데 그 재료는 나무였다.

그렇다면 길고 휘어진 숟가락이 조선시대가 되면서 허리가 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조선중기의 숟가락은 거의 펴지다가 조선 후기는 완전히 일자로 펴진다. 또한 숟잎이 뾰족한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의 숟잎은 둥그러진다.

고려시대 당시 숟가락은 국그릇의 바닥과 딱 맞았지만 지금은 일자 숟가락으로 그릇에 다 닿지 않는다. 그래서 휘어진 숟가락은 국을 먹는 용도로 사용하고 밥은 젓가락으로 먹었으며,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밥을 먹는데 숟가락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시대는 소중화라고 말하며 주자학을 따라 숟가락으로 밥, 젓가락으로 반찬을 먹는 것이 예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젓가락으로 면, 건더기를 먹고 국물을 먹다보니 우리는 적당한 염도를 보이지만 일본의 경우 젓가락이 없어지고 숟가락으로 모든 음식을 먹다보니 염도가 좀더 높아진 것이다.

 

명천에 사는 태씨라는 사람이 잡아온 물고기 명태

우리는 물고기 이름에 어와 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한자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어와 치가 빠진 고기 이름은 다 스토리가 있다.

소빙하기인 1600~1800년에 명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극에 살던 명태가 너무 추워지니 자신에게 맞는 온도를 찾아 내려온 곳이다. 명태가 처음 나타난 곳이 함경, 강원, 경상 순으로 보이고, 일본 순서로 발견하게 되는데 처음 만들어진 이름이 명태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이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온돌이 나온다. 이전에는 방 일부에 불을 피우는 방식에서 방 전체를 데우는 온돌로 변하는데 전체적으로 보급이 되는 때는 1700년에 이루어지며, 당시의 방의 크기는 매우 작아진다. 왜냐하면 많은 땔감을 이용해 방을 데워야 하기 때문에 난방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선시대 방들은 모두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재를 모아 강에 버리니 강에 재가 모여 비가 많이 오면 강 높이가 낮아져 홍수가 났고, 이를 막기 위해 영조가 청계천을 준설하고 나서 강의 수위 조절이 되기 시작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린시절 온돌방에 살던 기억을 보면 불이 직접 들어오는 아랫목은 장판이 탈정도이고 윗목은 덜 대워진다. 이때 볼수 있는 음식의 조합을 보면 메밀+동치미+꿩고기이다. 메밀은 가을에 맺혀서 겨울에 추수하고, 겨울에 얼음 뜬 동치미와 한가할 때 사냥 가능한 농번기에 꿩을 잡아서 국수를 만들어 먹는 문화가 생겼다.

메밀을 빻아서 반죽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면 생산 작업을 온돌방에 모여 만들어서 메밀국수를 먹게 되는데 방도 뜨겁고 술을 먹어 같이 뜨거워진 몸을 시원한 메밀로 보완하는 음식이었다.

이런 음식문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인 냉면이 되어 배달이 가능한 대중 음식이 된다. 당시 냉면 육수에 처음 미원의 원조인 아지노 모도로 사용해서 대중음식으로 확대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대부 여인이 식당에 가서 모르는 사람과 면음식을 먹을 수 없어 배달 문화가 생긴 것이다. 음식의 첫 번째 산업화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함흥냉면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개마공원은 감자 농사가 원래 잘되는 것이다. 이 감자 농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보급된 것이며, 감자농사가 잘 돼서 나온 잉어 감자로 녹말을 만들어 남는 양이 발생하게 되고 그 녹말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이 함흥냉면이며 원래 이름은 그냥 국수였다.

이 함흥냉면은 1.4후퇴때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모리오카의 함흥냉면을 만들어 팔게 되면서 모리오카의 대표음식이 되었다. 그 이름은 함흥냉면이 아니로 모리오카 국소로 변형된 함흥냉면의 사촌이 생긴 것이다.

냉면의 친척은 화전민들이 경기 북부, 강원에서 만든 막국수, 부산에 정착한 북한사람들이 냉면을 만들어 먹고 싶은데 없으나 남아도는 미국 원조 밀가루로 만든 밀면, 광신 제면이란 냉면 공장에서 우동면 기계로 잘못 뽑아 나온 면이 쫄면으로 신포시장에서 시작해서 신포 우리만두에서 팔기 시작했다.

중국 냉면은 원래 없다. 우리나라 냉면에서 보급해서 얼음을 넣어 먹는 우리나라 음식이 원조이다.

 

강화 도령네 콜라병

코카콜라의 후발주자인 펩시콜라는 더 설탕량을 높여 만들었는데, 1970년대 펩시콜라가 우리나라에 출시되었는데, 놀랍게도 조선시대 철종 (강화도 태생)이 살던 집에 용흥궁이라고 이름을 지였는데, 그 위에 강화도 영국 성공회 성당이었었고 그 밑에 있던 공장터가 있었는데 2006년 강화군에서 그 곳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펩시콜라 병이 나왔다.

그 병은 1906년도에 사용된 병으로 확인되었다. 이 당시 미국 배가 일본에 들어오는데 그 배에 미국 대통령의 딸, 장관, 정치인이 타고 있었다. 그 미국 대통령 딸이 명성황후의 묘지에 있는 석마를 타고 사진을 찍었다. 이때 온 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강화도로 상륙했거나, 한국사람의 손으로 옮겨진 콜라가 강화도 땅에 펩시콜라가 한국 땅을 방문하게 된다.

시대를 거슬러 펩시 콜라병은 새로운 음식 문화가 시작됨을 시사하는 상징물처럼 발견된 것이다.

 

음식 문화에 정답이 없듯, 문화도 정답은 없다

시대가 흐르고 상황이 바뀌고 생각과 기술도 언제나 바뀌어 왔다. 우리나라 제사상에 사과가 올라간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제사상에 바나나를 노는다고 핀잔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간 제사상에 피자와 치킨이 오르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은 오로지 나의 것이며, 지금과 미래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변하고 적응해나가면서 만들어가는 문화들에 훈수하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의 물결에 같이 올라타, 그들이 변하는 이유와 변한 것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형진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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