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이 사

지금까지 우리는 자기 한 몸의 출세나 부,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거절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정신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번 호부터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인격들이 등장한다.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철학자들, 그에 앞서 우선 정치인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 ?~기원전 208)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는데, 순자(荀子)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진나라로 가서 여불휘(진시황제의 친아버지)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그러다가 진나라 왕(후일의 진시황제)을 만나 천하통일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제는 이사에게 먼저 진나라의 제도법령 개혁과 정비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사는 이어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눈 다음, 모든 군은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했다. 또 시황제는 그의 제안에 따라 화폐 단위와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또한 이사는 천하의 모든 문자를 전서체(篆書體)로 통일시키도록 했는데, 한자(漢字)는 그 후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존속되어 왔다. 이에서 보는 것처럼, 이사가 집권 초기에는 진시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훌륭한 정책을 많이 폈거니와, 또한 그것이 중국 천하통일의 기반을 갖추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사는 사치와 방탕의 상징인 아방궁(阿房宮)을 짓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동서 700m, 남북 12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건물을 건설하는 데에 죄수 7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아방궁이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타고 말았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사라는 인물이 후대 유학자들로부터 유독 증오의 대상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시황제에게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건의하였다는 데 있다. 이사는 무엇보다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그런데 시황제 34년에 전국의 유생들이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승상 이사는 이번 기회에 모든 책은 불태우되, 다만 의약(醫藥)과 점복(占卜), 농업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시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분서(焚書) 사건이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이사는 허무맹랑하게도 불로장생(不老長生) 약초를 구하도록 건의하였는데, 그 약을 구하겠다고 떠난 진시황의 방사(方士, 술법을 하는 자) 노생과 후생이라는 자가 많은 재물을 취한 뒤, 도리어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시황제는 함양(진나라 수도)에 있는 유생들을 체포하여 무려 460여 명을 구덩이에 매장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그 악명 높은 갱유(坑儒) 사건이다.

그러나 시황제가 죽은 후, 이사는 환관(내시) 조고(趙高)와 공모하여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시황제의 장남 부소와 장군 몽염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리석은 2세 황제(호해)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국정을 농단했다.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와 조고와의 사이에 암투가 벌어진다. 이사는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황제 호해에게 아방궁 건설의 중단을 건의한다. 그러나 호해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고는 이사를 혹독하게 고문하여 모반을 자백 받았고, 결국 이사는 기원전 2087, 수도인 셴양(함양)의 시장터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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