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1. 들어가는 말

국내 수필 문학사에 있어 소청의 작품들이 신문학의 새로운 전형(典型)으로써, 전범(典範)으로써 평가할 만 한 분명한 이유는 그의 수필이 우리말과 글을 그 특성에 맞게 가장 적절히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낱말이나 단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어휘와 문장의 구성까지도 가장 우리말다운 맛깔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을 살려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수필은 처절한 삶의 현실을 기반으로 했으면서도 현실의 나락(奈落)으로 추락하지 않은 고품격 영혼(靈魂)의 엘레지이며, 이상을 추구하되 관념에 함몰되지 않은 채 개인과 시대의 실상을 조화롭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분석 이전에 소청 문학이 탄생 될 수 있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소청 개인의 삶에 대해 먼저 검토해보고자 한다.

 

2.소청의 삶과 문학의 배경

과거 영광지방은 각종 수산물의 보고인 칠산(七山)바다와 기름진 농토를 배경으로 어(), (), (), () 등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산물(産物)들이 풍부했기에 먹고 사는 문제만큼은 타 지역에 비해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렇듯 여유로웠던 경제적 기반은 이 지방 사람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문화를 쉽게 접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開港)과 더불어 신문화(新文化) 운동이 선진(先進)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신교육(新敎育)을 받게 된 각 분야의 걸출한 인재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신교육 운동은 영광지방에서 모국어 사랑 운동과 더불어 국제적 연대 속에 에스페란토(Esperanto)운동까지도 전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07년 영광의 애국청년들에 의해 영광 향교 명륜당에 광흥학교가 설립되어 인재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주도했던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어디애서도 찾을 수가 없어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어서 1914년 담양의 창평학숙에서 고하(古下) 송진우, 인촌(仁村) 김성수와 함께 공부했던 광주 농업중학교 1회 졸업생인 위계후 선생이 영광 보통학교 훈도로 부임 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 했는데 그에게서 교육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로는 죽창(竹窓) 김형모와 시조시인 조운(曺雲)을 들 수 있다. 죽창 김형모는 이 때 우리나라 최초 여류 소설가인 목포출신 소영(素影) 박화성과 함께 영광 교회 주일학교 반사로 있으면서 연극(각본. 연출. 분장. 효과. 배역까지 도맡아 함)을 공연하기도 했고, 반상의 차별과 남여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서로 끝까지 존칭을 쓰는 행동으로 신문화 운동을 실천했다. 한편 1900년생인 조운은 위계후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나이 20이 되는 19193.1운동에 가담 했다가 지도인물로 낙인이 찍혀 일경의 추적을 받자 이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후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아 다니며 금강산, 황해도 해주, 개성 등의 고적을 답사한 후 1921년에 귀향하고, 그 해 동아일보에 그의 첫 발표작 <불살러주오>가 실린다. 이후 계속해서 그의 작품이 발표되는데 1924년 조선문단 2호에 <초승달이 재를 넘을 때> <나의 사람> <울기만 했어요>등의 작품들이다. 그 뒤를 이어 1901년생인 최학송도 조선문단 1호에 고국(古國)이란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오고, 조선 문단 창간호를 통해서는 정태연(鄭泰淵)<바람에 나붓기는 갈대를 볼 때>, <바람>이라는 두 작품이 실리고, 3호에 <아아 나의 애인이어>, 4호에 <적막한 때>, 5호에 <설취. 雪吹>, 42호에 <물방아>를 마지막으로 추천이 완료되었다. 그 뒤로는 1925년 제 4호에 조옥현의 <선운사의 밤>이 실리고, 영광 최초의 여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금주(金珠:조운의 바로 아래 누이이며 김형모의 처)의 시가 7호에 실려 있다.

당시 김형모의 여동생인 김가진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외에도 신학문에 몰두한 여성들로 배화여고에는 송남순. 위복경. 노성안 등의 선배들이 많이 가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가람 이병기의 일기에는, 1927727속적삼을 빨다가 어머님(조운 모친으로 추정)께 빼앗겼다. 강연 원고를 쓰다 붓을 멈추고 앞집 지붕 너머로 우거진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왕매미 소리를 들었다. 조상하 군이 점심을 준다. 소주도 사왔다. 맛이 좋다. 음식들을 잘 해 먹을 줄 아는 곳이다. 의복도 사치하다. 운인(韻人)과 율객(律客)이 많다. 자래(自來)로 영광은 부읍(富邑)이다. 조희경 이하 수 삼 백석 이상짜리가 수 십집 된다. 전읍(全邑) 700여 호에 빈민도 있지만은 다른 곳에 견주면 그래도 나은 모양이다. 그리고 이 근래 일찍 열린 곳이다. 새 학식. 새 사상 가진 청년들이 많고 아직까지도 부화(浮華)한 풍기(風氣)는 없어 질실근면(質實勤勉)하다. 청년회. 노동회. 토우회(土友會). 추인회(秋人會)가 있어 그 진행하는 방법은 서로 달라도 서로 타협적으로 평화스럽게 지낸다. 이만한 부읍이고 보면 주사화도(酒貄花道)에 골몰하는 청년이 많을 것이로되 이 영광에서는 그리 볼 수 없다.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볼 것이다. 이번 한글 강습회에도 남여 70여명이 정성스럽게 들었다.” 730일 일기 말미에는 꿈속 같은 숲속 길을 찾아드니 불갑사다. 주지 송혜은이 나와 맞는다. 불이문(不二門) 안 선방을 치고 들다. 저녁밥을 시켜먹고 나서 만세루에서 악사의 주악, 시조, 잡가, 무희, 꽹과리 등 놀이로 밤을 새우다. 법당의 부처님도 귀가 좀 아팠을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누가 잠을 자겠느냐?” 또 그 다음날 일기에는 아침밥을 먹고는 모두들 누워서 세상모르고 잔다. 점심때에야 잠을 깨었다. 시조강화(時調講話)를 만세루 죽상(竹床) 위에서 열었다.”는 기록이 있고 1940917일 일기에는 조운 군의 엽서를 보다.”라고 적혀 있으며, 19461231일 일기에는 남령군과 같이 책을 정리했다.”라고 적혀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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