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낌은 백 년이다. 그만큼 일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다. 오늘도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소식들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젠 정상과 정상이 아님을 구분하는 자체가 점점 혼란스럽다는 푸념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 만들어지는 혼란은 심각하다. 온통 분열과 블러핑으로 이합집산이다. 그리고 한결같이 바탕에는 사적인 욕심이 깔려 있다. 이젠 국민을 향한 교언영색도 없다. 국민을 위한다는 진심 어린 거짓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살길을 찾아 날뛰는 야차들만 모든 미디어를 채우고 있다. 동참자는 연배에 휘둘리지 않고, 젊은 자와 늙은 자가 조금의 다름도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흠집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는 모두 넉 달 뒤로 다가온 총선이 원인이다. 금배지의 욕망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혹은 이들에겐 처음부터 욕망 외에는 포기할 감정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리가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

동물 중에 바비루사라는 돼지가 있다. 바비루사는 다른 돼지가 갖지 못한 어금니가 두 개 더 있다. 이 어금니는 주둥이의 위를 뚫고 나와 자신의 두개골 쪽으로 휘어지며 자란다. 이 어금니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부 동물 학자는 암컷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식 본능적 어금니라고도 한다. 이 어금니 모양 때문에 사슴멧돼지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전혀 쓸모가 없으며 몸통에는 털이 없다. 문제는 바비루사의 위로 멋지게 뻗은 어금니가 때로는 자신을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선형으로 자라면 둥글게 굽지만 휘어짐이 자신의 머리를 향하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작은 욕심의 어금니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뚫고 들어오는 최악의 적이 되고 만다.

욕심은 모든 기회를 앗아간다. 멈출 시기, 물러날 시기, 돌아볼 시기 등은 욕심의 망에 가려 판단을 흐리게 한다. 경제인이 회사를 잃거나 정치인이 선택을 잃으면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 이들에게 생물학적 삶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단(四端)을 버리고 추한 욕망을 취한다. 젊은 자는 실권자와 물밑 거래를 하고 늙은 자는 분당과 창당 운운하며 협박질이다. 의를 버리고 이()를 취하기 위한 최선이다. 젊은이의 교활함과 늙은이의 비겁함은 모두 바비루사의 어금니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뿌리를 쳐내고 있음을 욕심으로 인해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욕심은 본래 추하다. 정치인의 욕심은 여기에 시민의 공멸까지 더해진다. 자신의 두개골을 향한 바비루사의 어금니를 멈추지 않으면 얼굴은 웃지만, 생명은 스러진다. 사람의 생명은 생각이다. 바른 생각은 의리에서 나오고, 의리는 사람 사이의 체면에서 만들어진다. 제발 기본적인 체면은 유지하고 살아보자. 인성은 변하지 않으며 정치 철학은 인성에 바탕이 있다. 노자는 성인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갖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이나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나 모두 착하게 대한다.” 그러면 세상에는 덕이 선해진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 권력을 탐하는 부류와 많은 괴리감을 느끼는 말임을 안다. 그래서 버리라는 말은 하지 말자. 얻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國之利器不可以示人)”라는 말도 시대를 넘은 교훈이다. 나는 잠자리에 들면 항상 하루를 복기한다. 후회가 많은 복기지만 추해지지 않는 방법으로 평생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옳다는 건 아니다. 부끄러움을 최소화 해보자는 의지이다. 바비루사의 어금니처럼 자신의 머리를 파고드는 추한 욕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영원히 역사의 벽에 박제가 되어 남는다. 가장 잘 죽는 사람이 가장 잘 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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