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국가 보훈부는 지난 25일 세계 속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202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을 선정했다. 시작인 1월의 독립운동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나머지 37인을 상대로 딴지를 걸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승만이 대표적 위치로 독립운동가의 중앙을 차지한 데에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다. 먼저 이승만 평전을 쓴 김삼웅 옹의 짧은 글을 살펴보자. 제목은 독부獨夫에 관하여이다. 여기서 독부의 사전적 의미는 인심을 잃어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남자. ()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한다. 선왕이 맹자에게 탕왕과 무왕이 걸과 주를 쳤는데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게 옳으냐는 질문을 던지자 맹자는 잔적은 일부(一夫/獨夫)에 불과하다. 일개 평범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아무리 왕이어도 하는 행위가 일부이면 어차피 일부라는 의미이다. 독립운동가로 포장한 그의 이면은 많이 달랐던 것이다. 최근 현대사를 돌아보면, 소위 보수 정부가 정권을 잡으면 항상 수면 위로 올라오는 망령이 있다. 바로 이승만을 내세운 친일 망령이다. 앞에 붙는 수식어는 자그마치 국부(國父)’. 나라에는 생명이 없으니 굳이 해석하자면 국민의 아버지 즉, 임금이다. 이러한 발상의 시발점은 어처구니없게도 친일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기를 일제 강점의 해방으로 가져가면 헌법에 적시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힘을 잃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많은 독립운동가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 길을 잃는다.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대부분 길을 잃은 이유를 우리는 지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친일을 비난하면 왜 용공 좌파가 되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현 정부 들어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이승만의 추앙조차 이젠 익숙해지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리고 초대 대통령까지 되었다. 거짓 뒤에 진실은 숨었고 치적(恥績)은 치적(治績)이 되었다. 그는 당시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 등의 의거를 테러 행위로 인식하고 비난을 아끼지 않았으며, 독립자금 부정행위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쫓겨났다. 4.19 학생과 시민혁명으로 다시 국민에게 축출을 당했으니 두 번 쫓겨난 셈이다. 젊은 시절의 대단했던 선각자는 나이와 함께 추해졌고 그의 범죄는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임시정부 수반의 직위를 맡았지만, 독립운동 행적은 초라하다. 단지 미국과의 친분에 더해진 화려한 글솜씨가 한성임시정부와 노령 대한민국의회, 상해임시정부의 수반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해방 후에 저지른 이승만의 노욕은 열거가 힘들다. ‘검은 머리 미국인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의 무능과 무책임은 전쟁이 발발하자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과연 국민 위에 군림하는 국부였다. 자신만 살겠다며 일찌감치 한강 다리를 폭파한 후에 도망갔고, 한강 폭파로 죽어간 국민이 수백 명에 달했다. 그의 그림자는 김구 선생의 암살 뒤에서 어른거리고, 조봉암의 죽음 뒤에서도 어른거린다. 독실한 개신교인으로서의 행적은 불교 탄압이고 불교계의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불사 정리는 정리가 아니라 불사 혼돈으로 치달았고 조계종은 권력 다툼의 야단법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들의 다툼에 각목과 쇠파이프가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승만의 말년은 권력 연장을 위한 술수와 정치 깡패, 독재로 점철되었고 모든 민족주의자는 용공 분자로 분류되어 제거되었다. 실질적인 보수는 당시 거의 궤멸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4.196.10 운동도 대한민국에 봄은 가져오지 못했고 이승만 부활은 검찰 독재가 다시 부추기고 있다. 봄소식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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