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정도전(4)

두 사람(박순과 이성계)이 침식(寢食)을 함께 하던 어느 날, 처마 끝에서 쥐가 떨어졌는데, 그 어미 쥐에게는 새끼 두 마리가 딸려 있었다. 군사들이 죽이려 하자, 박순은 죽이지 마라. 한갓 미물도 새끼를 버리지 못하여 안달하지 않느냐? 그런데 사람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요?” 하니, 이에 이성계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박순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보이는데, 의형제였던 이지란 장군의 유서였다. 그 내용은 이성계 부자(父子)의 화해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이 누구인가? 그는 여진족 아라부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고려 공민왕 때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 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l, 2차 왕자의 난> 때도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특히 태조 이성계가 은퇴하자 승려가 되었던 사람이다. 이에 이성계는 눈물을 터뜨리며, “며칠 있다가 나도 가겠소. 먼저 가서 상감(이방원)에게 전하시오.” 하였다.

하룻밤을 함흥에서 더 묵은 박순은 다음날 아침, 행장을 차려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가신(家臣)들이 이성계의 마음을 바꿔 놓고 말았으니. 이성계는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되, “용흥강(함경남도 동부흐르는 )을 건너갔으면 내버려두고, 아직 건너지 못하였으면 목을 쳐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런가? 박순이 막 배 위에 오르려던 찰나, 군사들은 그의 목을 벤 다음 관에 넣어 이성계에게로 가져갔다. 강을 충분히 건넜으리라 믿고 있던 이성계는 관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후, 이성계는 무학대사(無學大師, 이성계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하였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의 스승이 되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음)의 설득으로 겨우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에 이방원은 교외에 나가서 친히 부왕을 맞이한다. 이때 하륜 등은 차일(遮日-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포장)을 받치는 기둥으로 큰 나무를 쓸 것을 건의한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만나는데, 이성계가 이방원을 노려보다가 동궁(彤弓-붉은 색깔로 장식한 활)에 백우전(白羽箭-백조의 깃털이 부착된 화살)을 끼워 힘껏 당겼다. 이방원이 급히 차일 기둥 뒤로 몸을 숨기니, 화살이 그 기둥에 명중하였다.

이성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하면서, 나라의 옥새를 건네 주었다. 이에 이방원(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고 잔치를 열었다. 이때에도 주변에서는 직접 술을 올리지 말라고 건의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방원 대신 내시가 잔을 올리자, 이성계가 다 마시고 나서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놓았다.

고려의 충신정몽주는 기울어가는 종묘사직을 끝까지 붙들다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면에 그의 죽마고우였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에 올라 화려한 시대를 열어갔다. 하지만 그 또한 격렬한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이 두 사람 가운데 과연 누구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인가는 그 시대적 상황과 평가자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리라.(정도전 끝)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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