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효 진
(재경영광군향우청년회 회장)

  항상 젊게만 생각되던 우리 큰 형님도 어언 육십 중반의 나이가 되셨다. 이런 저런 대소사로 고향에 자주 드나드는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7년 전에 뜻하지 않던 어머님의 병환으로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낙향하시어 고향에서 칩거하고 계시는 큰 형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얼마 전, 아버님 제사 때, 큰 형님은 향우회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째 재경 법성면 향우회 카페가 그리 썰렁하냐?”고 꾸중 아닌 꾸중을 하셨다.

그리고 짬짬이 올려주시던 향토사와 관련되는 내용의 글을 요즘 들어 자주 올려주신다.


이번 글은 며칠 전, 큰 형님 법경헌(法鏡軒)께서 재경법성면향우회 카페(http://cafe.daum.net/bsp7373), 고향소식 란에 올려주신 글 가운데 공감되는 글이기에 큰 형님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옮긴 글이다. 




소드랑 섬의 소드랑은 솥도 아니요


솥뚜껑도 아니요 쏭두라다 ?






법성포 12경의 하나인 정도낙안(鼎島落雁)의 현장 소드랑 섬 (사진제공;법경헌)


20여 년 전에 “법성향지”를 편찬하면서 이미 고인이 되신 신명희(申明熺), 김일록(金一鹿), 임선혁(林善爀) 선생(당시 법성병원장, 법성향지 초판 편찬위원장) 그리고 “법성향지”를 집필하신 김영남(金永南) 선생 등이 “법성향지”를 편찬하기로 발기 할 당시 법성포 12경중의 하나인 정도낙안(鼎島落雁)-소드랑섬에 떼 지어 내려앉은 기러기 무리들의 광경의 현장인 소드랑섬의 한문 표기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셨는데, 소드랑이란 말이 솥뚜껑을 일컫는 우리지방의 사투리이기 때문에 솥 정(鼎)을 쓴 정도낙안(鼎島落雁)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고 솥뚜껑 멱(鼏)자를 써 멱도낙안(鼏島落雁)으로 씀이 옳다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솥 정(鼎)자와 솥뚜껑 멱(鼏)자를 비교 해 보면 솥 정(鼎)자에 덮을 멱(冖)를 더 한 것이 솥뚜껑 멱(鼏)자이니 법성포 12경이 전래되면서 멱(鼏)자가 정(鼎)자로 잘못 기록되어 전래되었을 개연성도 있고 원론적으로 소드랑섬의 소드랑이라는 말이 솥뚜껑이라는 말이니 한자로는 멱도(鼏島)로 표기함이 옳다는 의견들이었다고 한다. 신명희(申明熺) 선생의 유고인 법포견문기(法浦見聞記)에는 초정(草情) 조의현(曹宜鉉)선생의 법성(法聖) 시(詩)가운데 멱도낙안(鼏島落雁)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멱도낙안(鼏島落雁)


영호반(映湖畔) 가을소식 전 하온지 오래거든


무삼 소식 물고 왔나 어찌 이리 더디 옵네


기러기 두어줄 점점이 떨어지니


봄바람에 불려간 님의 소식 애닯어


(주:영호반은 다랑가지 제월정 앞 바다를 일컫는 말임.)




신명희(申明熺)선생은 아마 이러한 기록들이 참고 되어 그동안 정도낙안(鼎島落雁)이라고 일컫던 청둥오리 떼들의 군무를 멱도낙안(鼏島落雁)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러한 연유로 정도낙안(鼎島落雁)이라고 예전같이 쓰지 않고 멱도낙안(鼏島落雁)이라 써 법성포 12경을 목각하였는데, 지금 천일주유소 앞 법성공원에 석비를 세우면서 이 목각에 새겨진 글을 탁본하여 대석(臺石)에 새겼기 때문에 법성포 12경을 새겨 놓은 법성포내 조형물 중 법성공원 표지석의 대석에만 유일하게 멱도(鼏島)낙안(落雁)으로 표기되어 있다.



▲멱도(鼏島)낙안(落雁)이라 새겨진 법성공원 표지석의 대석(臺石) 사진제공;법경헌




후일 김영남(金永南)선생은 법성향지를 편찬하시면서 이런저런 논리가 맞다하더라도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온 조상들이 물려주신 법성포 12경을 감히 바꿔 쓸 수 있겠느냐?하는 생각에서 “법성향지”에는 예전대로 정도낙안(鼎島落雁)이라 기록하셨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별다른 의견 없이 정도낙안(鼎島落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오랜 세월 독학으로 한학을 자득하고 비전(秘傳)으로 알려진 옥수진경 등 풍수지리서를 주야로 탐독하여 이 분야에 탁견(卓見)을 지닌 이웃 후배와 지금 공사가 한창인 걸레바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법성포구(法聖浦口)의 형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드랑섬은 풍수지리상 솥으로 보지 않고 "쏭두라"로 본다는 것이다. 법성포의 방언에 고기를 잡아 담아놓는 용구를 "쏭두라" 또는 “쏭두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소드랑이라는 말이 쏭두라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세월이 흘러 소드랑으로 변음되었는데 지금 공사가 한창인 걸레바탕이 완공되면 바로 그 걸레바탕이 진짜 소드랑섬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솥 정(鼎)자의 형국이 된다는 것이다. 솥 정(鼎)자를 한자의 최초 형태인 갑골문(甲骨文)이나 청동기에 새겼다는 금문(金文)에서 보면 다리가 셋인 솥의 모양을 생생하게 표현한 상형문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걸레바탕의 조감도를 보면 다리가 셋 달린 솥의 모양이다. 걸레바탕과 법성포구의 연육이 목적이라면 하나의 다리로도 충분할 텐데 세 개의 다리를 놓도록 계획되어 있다면서 걸레바탕을 솥으로 보면 이 세 개의 다리가 솥을 버티게 하는 다리로 틀림없는 솥 정(鼎)의 형국이라는 것이다. 바로 풍수지리를 원용한 설계라고 하면서 아마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설계했을 것 이라고 한다. 그동안 법성포구가 조리형국이고 큰소드랑섬은 쏭두라고 작은 소드랑섬은 빡주(법성포의 방언) 모양이라 법성포의 재물이 외부로 유출되어 큰 발전이 없었는데 걸레바탕이 솥의 형국으로 그것도 완벽한 세 개의 다리위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솥의 형국이 되어 앞으로는 밖으로 돈이 새어 나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리가 셋 달린 걸래바탕 조감도


과거 법성진성의 관아가 있었던 진내리의 중심부에서 내려다보면


걸래바탕의 다리가 위 조감도와 같이 법성 1교, 법성 2교, 법성 3교,


이렇듯 셋 달린 안정된 솥의 모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형님! 이 솥(걸래바탕)에 온기가 가시지 않으니 솥 주변에 있는 사람들(법성포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것이요.......”라고 하면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회룡 길지로 안동의 하회마을을 꼽았는데 앞으로는 법성포구가 으뜸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천백여 년 전에 옥룡자 도선국사(道詵國士)가 법성포를 “와우(臥牛)형이 천기(天基)로다.”라고 하였다는데 비록 인위적인 형상이지만 걸레바탕을 갈고 닦아 이 후배의 말씀대로 우리고향 법성포(法聖浦)가 천하제일의 길지가 되어 이 고장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영화를 안겨주었으면 좋겠다. 이제 걸레바탕이 진짜 소드랑섬으로 탈바꿈되어 우리고향 법성포(法聖浦)가 천하제일의 경승이 되도록 우리 모두 힘 합쳐 가꾸었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고향 법성포가 쏭두라나 솥뚜껑의 세상이 아닌 진짜 솥(鼎)의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07년 4월 26일법경헌(法鏡軒)이야기 중에서




추기 : 이 글을 쓰고 며칠 후, 소드랑섬의 소드랑이 쏭두라의 변음에서 연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이웃 후배를 다시 찾아갔다. 그동안 이 후배로부터 여러 차례 법성포구에 대한 해설을 들었지만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 듣는 그 순간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어 이 후배의 해설을 글로 엮을 심산으로 이 후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원고를 청탁하였는데 흔쾌히 이 부탁을 들어 주었고 며칠 후 법성포의 미래를 예견하는 글과 함께 도선국사(道詵國士)가 썼다고도 하고 도선국사(道詵國士)가 세상을 뜨고 난 먼 훗날 작자미상의 제자가 쓴 글이라고도 하는 “옥룡자유산록(玉龍子遊山錄”에 수록되어 있는 법성포 답산가(踏山歌)와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일지승(一指僧)이 법성포의 산야와 마을을 두루 보고 쓴 글을 첨기하여 보내왔기에 본인의 동의를 얻어 여기에 수록하였다.




“풍수지리학으로 본 법성포”


『와우(臥牛)형인 법성포(法聖浦)는 노령에서 개장(開障)하여 성송 구황산을 조종(祖宗)산으로 하고 삼태(三台)봉을 거쳐 굴곡(屈曲)기복(起伏)하여 무장면 왕제(王帝)산에서 한 가지는 심원산과 선운산이 되고, 원맥(元脈)은 공음 뒷산을 일으켜 한 가지는 덕림산이 되어 홍농 망덕산으로 행(行)하다가 상석에 과협(過峽)하여 봉대산, 금정산, 목냉기 산이 되어 법성 후면과 우측 바다 바람을 막아 주고 외수구(外水口)가 되었고, 안산(案山)과 대치미 장두산, 외수구(外水口) 사(砂)로 묘량 장암산에서 시발하여 영광 물무산을 거쳐 종산으로 백수 굴수산을 일으켜 법성의 안산(案山)과 귀봉라혈(貴峰羅列) 조첩(稠疊)하고 돔배 3 섬은 수구(水口) 라성(羅星)이 되었도다. 공음 뒷산에서 양동리 쌍봉(雙峰)산으로 힘을 몰아 초피산을 중조(中組)봉(峰)하고 과협(過峽)하여 오봉산을 일으켜 한 가지는 대덕산과 마치봉이 특립(特立)하여 좌보(佐補)하고 오봉산에서 갑묘(甲卯)왕자(王子)맥(脈)으로 평지(平地) 과협(過峽)(법성초등학교 뒤)하여 동령치(東嶺峙), 천북치(天北峙)를 일으켜 인의산이 소조(小祖)주봉(主峰)되어 숲쟁이 잔등으로 결인(結因)하여 와우(臥牛), 토산(土山)에 남향(南向)한 양택(陽宅) 집터가 되었다. 위에는 내당국(內堂局) 7리(里) 명당(明堂)과 주회(周回) 30여 리(里), 구황산에서 대통재까지 래룡(來龍) 7~80여 리(里), 앞에는 와탄(瓦灘)수(水)요 뒤에는 구암(九岩)천(川)이 흘러 상목에서 합류하니 산진수회(山盡水回)한 만득일파(晩得一破)의 대(大)길지(吉地)가 되었다. 지금 공사가 한창인 솥 모양의 걸래바탕은 오성(五姓)가성(佳城)의 땅이요 가가(家家)풍요(豊饒)롭게 살만한 터가 되겠다. 간(艮)방(方)은 인의산, 진(震)방(方)은 오봉산과 초피산, 손(巽)방(方)은 태청산과 대덕산이요, 병오정(丙午丁)방(方)은 천마봉, 옥녀봉, 석모사, 연호창, 복수문성(福壽文星)일자문성(一字文星)(쏭두라섬과 빡주섬:큰 소드랑섬과 작은 소드랑섬)이요, 미곤(未坤)방(方)의 감투봉은 쌍봉이요, 신경(申庚)방(方)으로 국사양봉(일명:보개산), 사자봉(일명;부엉바우)과 함께 내수구(內水口)의 한 문(門)을 겸하고 신술(辛戌)방(方)으로 대통재, 건해(乾亥)방(方)으로 금정산, 감계(坎癸)방(方)으로 봉대산이 있어 사면(四面)팔방(八方)으로 명산(名山)귀봉(貴峰)이 우뚝 솟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부자(富者)뿐 아니라 뛰어날 인물들이 많이 배출될 지세로다.


                          2007년 5월 2일삼가 윤보(允步) 씀』


옥룡자(玉龍子) 답산가(踏山歌)


동령치(東嶺峙)를 넘어가니


와우(臥牛)형(形)이 천기(天基)


일대(一帶)해수(海水)당조(堂朝)하니


인재(人才) 부고(府庫)되었구나


오백년을 지내거든


명현(名賢)군자(君子)나리로다.


병정방(丙丁方)이 통고(通高)하니


대대(代代)인물(人物) 끊어질까?


화개(華蓋)금성(金星)주인봉(主人峰)은


오성(五姓)구발(俱發)하리로다.




일지승(一指僧)의 법성포(法聖浦) 견문기(見聞記)


법성포(法聖浦)차내(此乃) - 법성포 또한


대지(大地)규모(規模) - 규모가 큰 곳으로


비단(非但)부국(富局) - 재물이 많은 곳일 뿐만 아니라


약과(若過)백년(百年) - 약 백년이 지나면


필생(必生)현배(賢輩) - 반듯이 큰 인물을 배출할 곳이다.


남토애(南土愛) - 남쪽에 들어선 산과 봉우리들이


기가려(其佳麗) - 수려하고 아름다워


유숙(留宿) 일야(一夜) - 하룻밤 묵고 간다.




이웃 후배의 “풍수지리학으로 본 법성포”라는 글과 오랜 옛날 도선국사(道詵國士)나 일지승(一指僧)이 본 법성포(法聖浦)의 글을 종합하면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가 풍수지리상으로는 밝은 미래를 지니고 있는 곳임엔 틀림없는듯하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사상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랫동안 우리들의 장묘(葬墓)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 폐단 또한 적지 않지만 글자그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론적 논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국토이용을 위해서는 필히 고려되고 있는 학문이다. 이웃후배는 지금 공사가 한창인 솥 모양의 걸래바탕을 일컬어 “오성(五姓)가성(佳城)의 땅이요 가가(家家)풍요(豊饒)롭게 살만한 터”라 하였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걸래바탕이 우리고장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곳임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고 또 그리 되도록 희망하여 왔다. 그래서 영광군에서 일괄 매수하여 관광의 요람으로 개발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걸래바탕을 평당 삼백만원씩 일반인에게 분양한다고 하니 이런 상황이라면 나의 바램은 희망사항으로 그칠 것 같다. 왜냐하면 영광군에서 일괄 매수하고싶어도 재정자립도 20% 안팎의 살림이라 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래바탕에 걸었던 내 기대는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전혀 대안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성포구(法聖浦口)에서 걸래바탕을 징검다리로 하여 쏭두라섬에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그리면 된다. 어느 지자체는 하찮게 여겼던 곤충을 우리 것으로 관광자원 화하여 이 지자체의 축제기간동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고속철이 임시 정차할 정도로 흥행하고 있고, 이 축제기간에는 우리나라의 메이저 언론을 동원(?)하여 이곳에서 둥지를 틀면 인접 시군까지 아울러 관광할 수 있는 곳임을 열심히 알리고 있다. 더불어 다른 지자체도 미래 산업의 꽃이라는 관광 진흥을 위하여 지역의 특성에 맞는 콘텐츠개발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영광군도 가가(家家)풍요(豊饒)롭게 살만한 터를 가꾸려면 법성포구(法聖浦口)에서 걸래바탕을 징검다리 화하여 쏭두라섬에 알찬 내용을 담아야한다. 우선 쏭두라섬 주위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오래전에 가꾸어 놓은 잔디구장을 갖춘 체육공원과 함께 해동공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유상(遊想)하고 갔다는 매바위, 그리고 건설이 한창인 식염천 휴게시설 및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칠산바다를 끼고 도는 백수 해안도로와 서해 낙조가 있다. 또 작년에 문을 연 백제불교도래지와 앞으로 필연적으로 개발될 목냉기와 뒤께가 법성포 단오축제와 연계되어 수변공원으로 관광자원화 될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영광군은 470여리의 리아스식 해안을 끼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홍농 칠곡리와 백수 구시미 사이에 칠산대교가 들어서고 염산과 무안사이가 영광대교로 연결되어 470 여 리의 해안길이 열리고, 66개의 유무인도라는 천혜의 관광자원이 어울러져 쏭두라섬의 콘텐츠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쏭두라섬을 이러한 자원들과 결부시켜 관광요람의 땅으로 변신할 수 있다.


흔히 관(官)의 조직은 경직화되어 창의성이 민간 기업에 뒤지고 예산의 한계성 때문에 사업추진이 지지부진하기 일 수라 한다. 그래서 영광군 같이 재정이 어려운 지방자치단체가 이렇듯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제 민간자본에 눈을 떠야 한다. 이제 관(官)은 기업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고 이들이 지니고 있는 창의성과 역동성을 100% 발휘하도록 도와 새로운 문명에 한 발 앞으로 다가 가야한다.


영광군이 쏭두라섬 주위의 경지와 임야를 일괄 매수하여 사업 부지를 제공하고 민간 기업을 시행자로 공모하여 일정 기간 후 기부체납 받는 형식의 사업시행방안도 하나의 대안이다. 마치 인천국제공항 가는 고속도로나 논산 고속도로같이 민간 기업이 건설하여 일정기간 후 시행 청에 기부체납 하듯이...........


지금부터는 걸래바탕에 생선회 센터 조성한다는 근시안적이고 난개발적인 발상은 제발 그만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던 땅에서 솟던 제발 통 큰 C.E.O. 방백(군수) 하나, 하나님이 점지하시어 미래의 후손들이 가가(家家)풍요(豊饒)롭게 살만한 터가 되도록 어서 빨리 쏭두라섬 삽질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문명의 축이 바뀌는 지금, 다가오는 미래를 빠른 속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100여 년 전에 숲쟁이에서 유성기를 듣고 진도(眞島)라는 일본사람에게 홀려 떼돈을 안겨 주었던 뼈아픈 과거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여야 한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일제강점기에 고창으로 넘어간 고보(高普)가 영광(靈光)에서 문을 열었고, 철로가 영광(靈光)땅을 지났다면 오늘날 영광(靈光)은 어찌됐을까?......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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