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론

고봉주/영광신문 편집위원





링컨 -더글러스 토론


1858년,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2년 전, 일리노이주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링컨은 당시 주지사였던 스테픈 더글러스와 미 선거사상 처음으로 후보자 토론을 벌인다.


일명 링컨-더글러스 토론형식이라고 불렸던 이 토론회는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여서 대중 앞에 직접나선 후보자가 서로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 하는 형식인데 한 후보자가 먼저 1시간 연설을 한 후에 상대 후보가 그에 대한 반박과 질의를 1시간 30분 동안 하고, 다시 처음 후보가 30분간을 연설하는 식이었다.


도전자 링컨의 제의를 받아들여 총 7회에 걸쳐 진행된 토론은 당시 현안이었던 노예 제도에 대한 찬반 토론이 주 쟁점이었으므로 두 후보의 격렬한 토론은 유권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즉, 유권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정견을 직접 비교평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토론을 계기로 미국은 현대 선거 토론의 방식을 확립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선거 출마자들의 찬반 토론 형태를 링컨 -더글러스 토론 형식(Lincoln-Douglas debate format)이라 일컬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비록 링컨은 일리노이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 토론회를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높임으로써 2년 후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케네디-닉슨의 TV토론


대통령 후보자간 텔레비전 토론은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이 효시다.


1960년 9월26일. 미국 역사상 최초로 시카고 CBS에서 열린 TV토론은 미국의 3대 TV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미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총 4차례로 나눠 진행된 토론에서 첫날의 메인 주제는 ‘국내문제’였으며 사람들은 8년간이나 부통령 후보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베테랑 정치인 닉슨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에 비하면 케네디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이었지만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케네디에게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2주전 무릎을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초췌해 보이던 닉슨과 달리 케네디는 구릿빛 건강한 얼굴에 젊음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케네디는 화면에 뚜렷하게 부각되는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유권자들을 설득해 나간데 반해 닉슨은 옆얼굴 만 드러낸 채 “나도(me too)”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날 라디오 청취자는 나름의 논리를 편 닉슨에게 후한 점수를 매겼지만 논리보다 감성과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TV의 속성을 모르고 있었던 닉슨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 토론회는 이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중요한 정치 과정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독일, 스웨덴, 핀란드, 이태리, 일본도 본격적으로 텔레비젼 정치토론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희한한 토론회도


김대중의 사상검증이라는 희한한 토론회가 있었다.


97년 말, IMF 체제하에서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보수계열의 한국논단이라는 잡지의 발행인 이도형씨가 중심이 되어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대로 엽기적인 사상검증을 했던 토론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만 연거푸 세 번의 고배를 마시는 동안 조작된 사상을 이유로 무수히 곤욕을 치러야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토론회에 참석을 한다.


하지만 일국의 야당 대통령 후보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별렀던 것부터가 무례하고 정도에 어긋난 발상이었다.


또한 토론회 내내 패널들이 김대중 후보를 야유하고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된 최악의 토론회로 남게 되었다.


결국 김대중 후보로써는, 비록 조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따라 다니던 김대중=빨갱이라는 등식의 꼬리표를 벗어던지기 위한 도박이 일단은 성공을 거둠으로써 대통령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지만 희대의 토론회를 주관한 단체의 지원을 받았던 이회창 후보는 패배의 수모를 당해야만 했으며 토론을 희화화 한 ‘한국논단’은 ‘한국농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한나라당의 경선 토론회가 남긴 것


1970년대 YS·DJ가 맞붙었던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이후 야당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경선을 해본 적이 없었다.


DJ는 4수를 하는 동안 둘러리 후보를 내세워 형식적인 경선을 치뤘으며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뀐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경쟁자를 일찌감치 따돌리며 일방적으로 앞서가는 재미없는 경선을 치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를 축으로 치러진 이번 경선은 상황이 달랐다.


경선투표 결과 1.5%라는 박빙의 차이가 말해 주듯이 양 진영은 피를 말리는 난타전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지난 6월 11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경선 등록을 시작으로 길고도 지난했던 70일간의 용호쌍박이 8월 19일 이명박씨를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옹립하고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번 경선은 23만여명의 선거인단을 포함하여 13차례의 합동연설회와 4차례의 TV 토론, 한 차례의 검증청문회를 거쳤던 야당역사상 유례가 없는 메머드급이었다.


하지만 경선토론 과정에서 갖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빅 2라는 이명박·박근혜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두 후보간의 사생결단식 네거티브 선거전은 거의 매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후보를 둘러싼 10여건의 고소·고발 등 내분사태도 벌어졌다.


내용 면에서도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국정수행능력이나 비전 같은 정치적 소신의 대결이 아니라 ‘도덕성 공방을 내세운 네거티브 설전과 여론조사 방식의 득실계산’ 같은 수준 낮은 대결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명박후보에게 남은 과제는


1.5%라는 박빙의 승부는 경우에 따라서는 한나라당을 흔드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박근혜 후보측에서 경선기간 내내 주장해왔던 것처럼 이명박후보가 도곡동 땅 차명의혹이나 BBK 문제 등으로 본선에서 곤란을 겪게 될 때 한나라당 내에서 후보교체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선 패배 후 박근혜후보가 밝힌 백의종군 발언이라든가 선거대책위 해체 등 현재의 분위기로 봐서는 대중 인기만을 의식했던 이인제식 탈당출마나 노무현식 후보 흔들기 등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을 일이라 여겨지지만 집안사람끼리 치룬 당내경선과는 달리 본선의 대결은 참으로 처절한 싸움이 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명박후보는 앞으로 당내경선보다 훨씬 더 험난한 과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997년 고공 인기행진을 지속하던 이회창 후보는 경선 후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후보 교체론'에 시달리다 패배를 했으며, 2002년에는 노무현 후보가 지방선거 패배 등으로 지지도가 속락하자 정몽준으로의 후보 교체 등 고역을 치룬 바 있었다.


박 후보 측이 경선 종반부터 필패의 사유로 제시한 '본선 완주 불가론'은 이후보가 깊이 되새겨볼 일이다.


박근혜후보측 홍사덕 선대위원장은 "이명박 전 시장은 '도곡동 땅'과 BBK 금융사기사건 의혹 외에 사법처리가 가능한 선거법 위반 사안이 6건이나 된다."며 "이 후보를 본선 완주가 불가능한 후보"로 규정한바 있다.


만일 본선 경선 중 BBK 의혹과 관련한 김경준 씨의 증거 제시와 도곡동 땅의 검찰 수사 발표 등 외부변수가 작용한다면 이는 자신들의 구호처럼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다시 연장해야하는 비운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