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를 팔다 말고, 기획팀장 영진은 청바지 차림으로 팔을 걷어부친채, 망치를 들었다. 24일 한전문화회관. 내일 있을 공연을 위해 무언가는 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않고는 견딜수 없다. 녹색 파란색 물들인 기저귀천을 입구에 늘어뜨려 우리의 깃발을 세우고, 억새풀 꺽어다 항아리에 담아 무대를 꾸며 우리의 철학을 짓고.

그렇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일상으로부터의 혁명.

8년전 그들은 선택했다. 스무살 피끓는 청춘, 조국의 아픈 현실을 기꺼이 온몸으로 거부했던 386의 젊은이들. 어느정도 민주혁명의 총론이 짜여진 93년. 이제는 각론이다. 그들 역시 영광에서 선택한 것은 생활속에서의 아름다운 변화. 그것이 영광사랑청년회의 탄생이었다. 다양한 취미활동을 매개로 건강한 생활문화를 만들어내고 지역의 현안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와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해나가는 청년들의 모임.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꿈과 희망 있는곳 나라사랑 배우는곳 통일세상 꿈꾸는 영광사랑청년회- 그들의 노래만큼은 멈출수 없었다. 그네들의 끊길 수 없는 이 노래가, 마침내 오늘 '제2회 영광의 노래와 시 발표회 -보소라! 님아 보소라...'로 울려퍼졌다.

일제시대 영광군민의 심금을 울리던 '금가락지' '하이얀 목련화'는 해룡중 문현미 선생님의 목소리만큼이나 노랫말도 곱다. 제도권에 속해 음악을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대중속으로 파고드는 음악을 하고싶다는 불갑출신 가수 유영대. 벚꽂 만발한 선들 잔등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어머니', 음악을 하면서 아내를 너무 힘들게 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쑥물'을 고향에 선사하며, 그의 눈물은 진짜 쑥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인생은 오직 한사람~ 쑥물같이 진한 사랑~ 가슴에 안고 살아요-

영사청 회원 남식은 목이 새도록 연습한 조운의 '선죽교'를 힘나게 암송했다. 아름다운 법성포를 음미한 조의현의 풍물시는 성숙이가 차분하게 읽어내려갔고, 쓸쓸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무대에 오른 은성이는 조영직의 한송이 외로운 '들국화'가 되었다. 근철은 고즈넉하게 조남령의 향수를 읆었고, 어느덧 옛시인들의 정기가 이땅 청년의 기상으로 되살아나 꿈틀꿈틀...

"초겨울 쓸쓸한 이파리들이 죄다 떨어지고 난 빈 공간에다, 영광사람이 만들고 영광사람이 향유하는 노래와 시로써 그 여백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이근철 회장은 이런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작년 제1회 발표회때, 매년 영광사랑의 이름으로 이 공연을 자랑스럽게 이어가겠노라던 다짐을.

"앞으로도 영사청은 그 약속을 묵묵히 실천해가며 자랑스런 향토문화를 되새기고, 미약한 힘이나마 영광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하려 합니다." 영광은 그의 말에 기대를 걸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

돈이 없었다. 주옥같은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지만. 돈을 들여 작곡가에게 그 일을 맡기기엔 영광의 문화는 너무도 가난했다. 이 회장은 학창시절의 후배, 아마추어 정영훈에게 조운의 대표작 석류, 파초, 야국, 설청 4편을 슬그머니 내놓으며 소주 한잔을 샀다.

-펴이어도 펴이어도 다못펴고 남은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바듯이 펴인뜻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지고-. 결코 돈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서울서 바듯이 달려온 영훈을 환한 웃음으로, 무대로 맞이한 이 회장. 둘이는 그 가락만큼이나, 참으로 비장하게 파초를 불렀다. 어느새 무대는 조운의 나라 걱정하는, 애타는 심정이 물결이 되어 너울너울...

세고비아에서 음반을 파는 명호와 왕섭이. 오늘은 여느때처럼 기타를 결코 신나게 두들기지는 않았다. -투박한 나의얼굴 두툴한 나의입술 알알이 붉은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가슴-. 아릿하게 임을 부르는 왕섭이. 애절하게 조국을 불러대는 명호. 우리는 모두 조운이 되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눈물이 되었다.

염산사내 진성은 타고난 노래가르치기 솜씨로 관객들에게 '야국'을 선물했다. -가다가 주춤 머무르고 서서 물끄러미 바래나니 산뜻한 너의 맵시 음~ 그도 맘에 들거니와 널보면 생각히는 이 있어 못견디어 이런다- 다들 따라불렀다. 박수치며 신명나게. 온 영광천지가 다 들리도록.

정설영, 김윤호, 정형택, 김경옥, 김규성, 남궁경, 박종훈, 임숙희, 장진기, 강구현, 김명국. 현재 활발하게 활동중인 영광 문인들의 시들도 낭송되었다. -조선시대는 홍문관 봉 일제때는 일본놈 봉 문민정부때는 원자력봉- 때론 분노와 격정의 함성으로. -한 잔 소주에 비틀거리는 타향의 꿈속에서 오늘은 나를 업은 연이 되어 굽어보시는 어머니- 때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소프라노 김보경이 부르는 '석류'와 '설청'은 조운의 시가 힘과는 또다르게, 감미로운 맛으로 다가왔고, 우리고장 클래식 음악의 보배 '실내악단 소리나래'의 선율은 청중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막을 열어준 호남우도농악단과 대미를 장식해준 영광초등 사물놀이단의 흥겨운 가락도 역시 우리영광의 노래라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막이내린 무대뒤. 한잔 술이 기울어졌다. 회장과 기획팀장은 유난히 소줏잔을 자주 비웠다. 누군가, 난 영사청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외침이 흘러나왔다. 격론이 벌어졌다. 그만큼이나 오늘의 발표회는 힘든 장이었다. 아름다운 토론! 영사청은 내일도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나갈듯하다. 일상속에서.

시인의 울부짖음과 더불어...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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