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론
고봉주/ 영광신문 편집위원

 

정미소로 시작한 삼성(三星)

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38년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창업하면서 출발하였다.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첫 사업에 투신했던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2년 후인 1938년 3월 대구시 수동에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는데, 국내에서 청과류와 건어물을 모아 만주와 북경 등지에 팔고 국수 등을 제조하는 작은 수공업 공장이었다.


규모가 커지면서 1941년 삼성상회로 법인등록을 하였고, 대한민국 수립 후인 1949년에는 삼성물산공사로 전환을 하면서 당시 서울의 100대 사업체 중 10위권으로 발돋움하는 등 성장세를 지속하게 된다.


전쟁 중이던 1951년, 삼성물산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규모를 확대하고 53년에는 당시 ‘미풍’이라는 조미료로 잘 알려진 제일제당을, 54년에는 모직물의 선두주자인 제일모직을 설립함으로써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삼성은 5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원을 공개모집하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경영을 하기도 했다.


1969년, 삼성이 초 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던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현 삼성전자)를 설립한 이후, 1982년 제19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삼설물산이 20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반도체 메모리 64M DRAM을 개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에는 288M DRAM 메모리 칩을 개발하여 상용화시키고, 삼성SDI에서는 세계 최초로 초 슬림 완전 평면 브라운관을 개발하는 등 전자산업에서는 무엇이든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고난 속에서 일군 기업


천석군의 아들로 태어났던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삼성에도 항상 양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6․25 전쟁 중에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으며 5․16 군사정변 때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성장을 지속하던 삼성의 최대고비는 사카린 사건으로 잘 알려진 한국비료사건이었다.


비료의 원료로 사용되며 발암물질로 알려진 (OTSA)가 밖으로 유출되어 시중에 유통됨으로써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비화됐던 것.


결국 이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야당정치인들의 집중적인 포화를 맞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때에는 유일한 민영방송이었던 동양방송을 뺏기는 수모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이병철 회장이 경영일선에 다시 복귀하여 전자산업으로의 진출을 선언하면서 세계 초 일류기업으로의 발판을 만들어 낸다.


고 이병철회장의 경영이념은 "인재(人才)와 기술(技術)을 바탕으로 최고의 기술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貢獻)한다."였다.


이회장이 작고한 지 11월 19일로 20년이 지났지만 한국 경제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모두 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남다른 식견과 강한 의지로 한국 경제와 산업을 든든한 초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인 것이다.


 


세계 속의 초 일류기업


현재 삼성은 창업주 이병철회장의 차남인 이건희 회장이 경영을 승계하면서 삼성공화국(?)이라는 거대기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세계 총 66개국에 445개의 지사 및 법인,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국내 고용인력 만도 16만6000명, 해외 근무인력이 9만2000명에 달하는 초 일류 기업으로 성장을 했다.


또한 영업실적에 있어서도 이 회장이 타계한 1987년과 지난해 말을 비교해 자산이 11조5000억원에서 261조원으로 23배가 늘어났으며, 매출액 역시 17조4000억원에서 우리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51조7000억원으로 9배가 늘어났다.


경상이익은 당시 2700억원에서 14조2000억원으로 무려 71배, 수출액은 11억달러에서 663억달러로 60배가 증가했다.


삼성의 매출은 국내총생산(GDP)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출은 한국 총 수출의 21%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삼성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삼성의 전방위 불법로비


삼성이 또 한 번의 위기에 놓였다.


삼성그룹의 법률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의 불법로비자금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시민단체와 일부 정치인들이 들고일어나 특검법제정을 촉구하는 등 삼성은 창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더군다나 “2004년 1월 당시 삼성전자 법무팀 상무로 있던 이경훈(45) 변호사 명의로 받은 선물 안에 현금 500만원이 들어있어 곧바로 돌려줬다”고 밝힌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의 고백이 이어지면서, 지난달 관련 의혹을 제기한 김 변호사의 주장대로 삼성 관계자가 청와대 인사에 대한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나타남에 따라 삼성 불법로비 의혹은 일찌감치 제기된 검찰 간부들의 떡값 수수 의혹을 넘어 정·관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2003~2004년 당시 삼성 에버랜드 사건 관련 그룹 고위 관계자들이 기소된 삼성 측이 법무비서관을 맡은 이 전 비서관에게 청탁성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검사 40여명에게 500만~2000만원씩 떡값을 건냈고, 이해관계가 맞물린 재정경제부와 국세청 등 인사들에게는 이 액수에서 ‘0’이 하나씩 더 붙는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三星)의 삼성(三省)을


삼성을 홍보했던 한 기고문에 따르면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회장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그는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캄보디아, 베트남을 보라. 나라가 부강해야 기업도 잘될 수 있다. 나는 항상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삼성을 경영해왔다”며 사업보국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업보국을 강조했던 창업주의 경영철학과는 달리 무엇이 오늘의 삼성을 위기로 몰아넣었는가?


에버랜드를 통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승계하려던 이회장 일가의 과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1979년 미국의 뱁슨대가 이병철 회장에게 최고경영자상을 수여할 때 이 대학의 소렌슨 총장은 이병철 회장의 공적을 이렇게 찬양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킨 것은 항상 그 사업의 시장성이 가장 낮은 수준에 있을 때였고 극히 곤란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끊임없는 파이어니어 정신으로 성취한 여러 사업의 업적은 사회에 대한 봉사, 바로 그것이었다.”


사카린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창업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삼성은 이번 불법비자금 폭로사건을 계기로 삼아 석고대죄 하는 심정으로 국민 앞에 모든 것을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부의 편법 승계를 획책하기 보다는 창업주인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삼성이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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