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묘량 영당 마을에 다녀왔다. 영광에서 자랑으로 삼고 있는 우도농악의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시간은 길었지만 레퍼토리가 다양한 우도농악의 굿풀이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그곳에는 신명이 있고, 우리 전통의 혼이 깃들어 있고, 끈끈히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감동이 나를 사로잡았고, 포괄적인 공연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단순한 농악이 이미 아니었다.

1970년대 몇몇 대학가에서 농악패가 조직 되었고,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 풍물굿의 논의가 거론되면서 대동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어수선한 시대에 풍물은 시위의 흥을 돋우었고 정부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아 배척하다보니 이내 대동굿은 사그라지고 풍물굿의 음악성만을 내세우는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다. 그 누구도 종합 예술로서의 풍물굿을 이해하지 못함은 전술만 보고 전략은 보지 않으려함과 동일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명칭의 문제

요즈음 학자들은 한결같이 농악이란 이름으로 보고서등을 작성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농악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재고해 보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우리의 옛 문헌을 봐도 농악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음이 사실이다. 글께나 읽었다는 양반님네들은 쟁고(錚鼓), 금고(金鼓)등의 말을 사용했고, 민중들은 '풍물굿, 지신밟기, 뜰밟이, 매귀, 풍장, 두레, 걸궁, 걸군, 글입' 등의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 쓰임새에 따라서 다른 이름을 가졌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시골 마을에 가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아직도 '농악친다'는 말보다는 '굿친다'는 말에 더욱 친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농악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우리 곁에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다름 아닌 일제시대부터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농촌이니 농민이니 하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음이 문헌상 확인되고 있고 더욱이 농악이란 말은 사용된바 없다고 한다.

중앙대 정병호 교수는 "농악"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은바 있다.

「농악 명칭은 우리나라 예능을 한자로 정리함에서 나온 어휘인데, 국악은 정악(正樂)과 속악(俗樂)으로 나누어지며, 속악의 장르 중 "농촌에서 쓰는 음악"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농악이라는 말이 처음 문헌에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부락제"라는 책에서이다. 따라서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의 잔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나 역시 농악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떻게 음악의 한 장르만으로 자리 매김을 해버릴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구경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것이 어디 음악이기만 하던가. 종합예술임이 분명한 우리의 신명난 한판을 가락 위주로 봐 버리는 치졸함을 우리 자신이 범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음악으로 분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풍물굿이다. 그래서 이름도 '농민의 음악'이라는 "농악"을 사용해서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우리의 좋은 이름을 일제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으로 바꿔 부르면서도 당체 부끄러움을 모르니 한심의 극치 아닌가.

1987년에 발간한 "민족과 굿"이라는 책에서 풍물꾼 김원호는, 풍물굿에 대한 시각 중에서 가장 저해한 시각이 가락 중심으로 보는 것이며 이는 풍물굿의 정신을 짓밟고 있다며 풍물굿의 현재 모습이 음악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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