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설영 시인의 시평(詩評)으로 되살아나는
시조시인 조운의 삶과 문학
이 고장 출신 천재시인 조운의 정당한 평가와 새로운 자리매김을 위해 조운의 생애와 당대의 역사적 환경, 그리고 그의 작품 하나 하나의 연구에 몰두해 온 영광의 중견문인 정설영시인.
정시인이 조운시인의 시조작품을 해설해 나가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조운시인에 대한 탐구 노력은 1988년 월북문인 해금 이후 선행되어 온 재조명 작업들의 깊이와 폭을 더욱 심화 확대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본지는 조운시인의 토속적이며 정감어린 시어(詩語), 그리고 시적 배경과 숨은 이야기 등을 낱낱이 기록하며 조운시조의 우수성을 다시금 확인해 가는 정시인의 해설문을 연재한다.
芭 蕉
펴이어도
펴이어도 다 못 펴고
남은 뜻은
故國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바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지고.
해설
이 시조는 김동명(金東鳴)의 시(詩) “파초”가 워낙 유명세(有名勢)를 얻어 그 그늘에 가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조운의 “파초”야말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도 남을 명시조(名時調)가 아닌가 싶다.
언뜻 보기에 외관상 감동이 별로인 너부적적한 파초잎을 보고 어쩌면 이와 같이 말을 아끼면서 감칠맛 나게 표현했을까?
파초가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고국이 그리워 갈갈이 이내 찢어진다라고 했으니...
낯선 이국땅에서 꿈은 피어나도 졸지에 좌절되고, 그럴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좌절이 되풀이 된다 라고 했으니, “파초”에서 조운의 태생(胎生)적인 고뇌와 비애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그는 조희섭(曺喜燮)과 광산 김씨(당시 호적엔 성씨만 기록 됐음)를 부모로 1900년에 영광읍 도동리 136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서출(庶出)이란 신분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재주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를 의식하며 성장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탯자리요, 잔뼈가 굵어 늙어가는 마당에 이방인의 입장에서 본 “파초”가 나왔을 리 만무하다.
한번은 사거리까지 동행하던 조운이 뒤떨어져 안 오길래, 그의 집으로 먼저 들어간 신명희가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뒤에 조운이 혼자 투덜대며 들어오더란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친구(신명희)가 물으니,“더러운 곳에서 태어난 놈들이 나보다 기생 아들이라고 하길래, 한바탕 쏘아 붙이고 온다”고 하더란다.
“어떻게 했냐”고 하니까, “나는 우리 엄니가 기생이어서 향내 펄펄나는 방에서 태어났는데, 고랑내 펄펄나는 방에서 태어난 놈들이, 날 놀린다고, 이렇게 퍼부어 주었노라고”
이와 같은 일화에서 그가 번뜩이는 기지(機智)로 일순간에 상대방을 제압할 줄 아는 달변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위 “파초”의 발표 연대가 작품 연보에 빠져 있어 불분명하나, 그의 시조가 무르익은 후기 작품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47년 추정)
편의상 필자는 조운이 시와 시조를 병행해 몰두했던 1920~30년대까지를 초기로, 시와 결별하고 시조에만 심혈을 기울인 1930~40대까지를 중기로, 그 후부터 1949년 12월(조운의 월북에 1948년 설이 있으나 1949년 12월 경으로 봄) 월북까지를 후기로 나누어 보았다.
월북이후에 쓴 시조가 있지 않을까 해 1989년 중국 연변대에서 가져온 자료까지 살펴 보았지만 불어난 시조는 단 한 편도 없었다.(한자어로 된 제목을 한글로 몇 군데 바꾸어 놓았을 뿐...)
그런 만큼 그의 창작기간은 30년 안팎으로 잡을 수 있다. (조운 연보에 조운의 아버지 조희섭을 오위장(五衛將)으로 표기해 놨는데 오위장(五衛將)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병제(兵制)로써 그 기능을 상실한 만큼 아전(衙前)으로 바로 잡는다 (조운 연보는 위증(생질)이 작성하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