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다시읽기

보통 우리처럼 역사를 이야기하고 쓰는 사람들은 사관(史觀)이니 역사를 보는 관점이니 하는 말은 쑥스럽고 거북하다. 이유는 학술적인 연구나 일정한 역사관을 갖고 파고드는 연구의 논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사학자들이 써 놓은 책이나 역사서 원문 등의 역주본을 뒤져가며 나름대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과 비교 평가를 해가며 판단을 내려 보고, 여러 사람이 공유하게끔 소개하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데는 확실히 관점인 사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도 관점이 다르면 견해는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논쟁이 되고 학문은 발전하는가 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만 갖고도 논쟁은 치열하다. 확실히 결함을 갖고 있는 책이지만 관점에 따라서 해석과 평가는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그 해석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내재한다. 보통 어느 책 한권을 놓고 판독을 하고 심층 연구를 한다고 하자. 결국 오류는 그 해당 책에서만 찾으려는 고지식함과 비융통성에서 중요함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역사적인 사실이 기록된 중요 문헌을 판독 해석하는 데에는 시대적 배경을 살피고 동시대의 금석문과 비문, 당시 쓰이던 문자(예를 들면 이두문) 등을 참고하고 현장 자료들을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는데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바로 현장성의 결여다.
그는 주로 중국의 문헌만을 뒤져 그것을 탁전(卓前)에서 퍼즐 맞추기로 가장 중요한 역사서를 완성해 버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번도 자기가 기술하는 역사의 현장에 나가 본적도 없을뿐더러, 답사는커녕 앞뒤가 안 맞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서술함에도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393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신라(내물마립간) 측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가야까지 내려와 왜를 물리쳐준 역사적인 사실을 내물왕이 계교로 물리친 것으로 적고 있으며(이 내용은 19 세기에 발견된 광개토왕 비문에 적혀있음), 이 사실을 설혹 신라 측이 남북국 통일 이후에 없앴거나 지웠다고 해도 신라가 갑자기 고구려에 볼모와 조공사신을 보내기 시작했는지 생각해 봤다면 다른 곳에서 사실을 발췌해 낼 수 있었을 것이고 역사서에 오류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김부식의 잘못된 사관
그리고 김부식의 두 번째 잘못은 사대의 정점에 서있던 그로서는 이두문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학자들이야 글을 읽히는데 서민의 글이 따로 있고 고급관리의 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 따로 있다손 치더라도 모두를 익히지 않으면 학자 대접을 받기 힘들지만 당시의 김부식은 이두에는 잼병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의 서적(남경태)을 통해서 예를 들어보고 넘어가자.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는 김유신의 아버지 이름을 서현(舒玄)이라 해놓고 김유신의 묘비에는 아버지 이름이 소연(逍衍)이라고 되어있다. 김부식은 이 대목에서 곤혹스러움을 느꼈는지 결국 “이름을 바꾸었거나 자(字)가 소연인지 모르겠다”고 어물쩍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그 두 이름은 사실 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음으로 읽으면 서현과 소연은 거의 비슷하며 고대에는 같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한문은 잘 알았지만 우리말인 이두법에서 음의 차용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처음에 잠깐 내비친 사관의 문제이다. 그는 신라 왕족의 가계를 이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역사관이 신라 중심이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삼국 중 다른 나라의 왜곡과 잘못된 평가는 큰 문제점이다. 특히 백제에 관련된 기술은 그 정도가 심하다.
삼국 말기에 백제와 신라가 서로 치고 받는 전쟁을 무수하게 치르는데, 그중 한 가지 그의 서술을 보면 “백제 말기에는 무도한 짓이 많았고, 또 대대로 신라의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손잡고 신라를 침범했으니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더욱이 당의 천자가 그 원한을 풀도록 명령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명을 어겨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적고 있다.
상대편이 때린 것은 폭행이고 내가 때린 것은 그냥 방어이니 상대편만 나쁘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당을 천자국인 상국으로 섬기려면 자기들이나 섬기지 백제까지 섬기지 않는다고 옳지 않다고 질타를 하고 있음은 가관이다.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그리고 이 무렵부터 당나라는 삼국사기에서 주어로 등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철저히 중국의 기록에만 의존하다보니 모든 것이 당주(唐主)가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서기에는 주위의 나라들이 많이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김부식은 우리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흥왕때 연호를 쓰기 시작하다가 진덕왕때 페지를 하게 되는데 삼국유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진덕왕 2년(648)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당나라에 조공을 하게 하였는데 당태종은 어사에게 분부하여 묻기를 ‘신라는 우리나라를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하므로 질허는 대답하기를 “일찍이 중국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나누어 주지 않은 까닭입니다. 당나라에서 못쓰게 하면 우리가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하였다.
이때 태종은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니 김춘추가 당태종에게 그의 아들 중 한명을 당태종을 숙위하게 해줄 것을 청하고 복장을 중국의 제도에 따라 고칠 것을 청한다. 그래서 진덕왕 3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는지 이 대목들을 읽어보면 알 수 가 있다.(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진덕왕 편)
그리고 고구려를 놓고도 그의 평은 가시가 돋친다. 현도와 낙랑은 기자가 봉함을 받은 땅이어서 본래 백성들이 아주 유순하고 좋았는데 무도한 고구려가 차지하고 난 후부터 중국과 대등의 관계에 서려하니 당태종이 문죄(問罪)하여 멸망시키니 이는 사필귀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민족 입장에서 보는 사관이고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울타리에서 나올 수가 있는 말인가.
삼국사기는 미혹서
그 외에도 그의 삼국사기라는 불완전한 타임머신은 계속해서 오락가락을 반복한다. 고구려 본기에 신대왕 4년에 스스로를 굽혀 현도에 속하기를 한(漢)에 청했다가 4년 뒤에 갑자기 전쟁을 일으켜 한군을 대파해 버리고, 수나라에게는 왕의 책봉을 역시 스스로 굽혀 청해 받고 3년과 8년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하다가 9년에는 갑자기 공격을 해버리는 어이없는 내용들은 후세에게 정사서가 아닌 곤혹스러운 짐을 안겨주는 미혹서(迷惑書)로 남고 만 것이다.
중국의 기록은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모두 ‘조공’으로 적는 습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춘추필법이다. 이는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나온 말로 중국에 오욕된 내용은 모두 왜곡하고 바꿔버려 서술한 것을 이른다.
춘추에서의 역사는 공자의 시각에 따라서 표현을 바꾸고 있으며, 이 방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사기의 서술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삼국지의 ‘왕숙전’에 보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경제)와 무제(무제)의 잘못을 사실대로 기술하자 무제가 대노하므로 사마천이 즉시 삭제를 했지만 결국 부형(腐刑:거세를 당하는 형)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역사서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내용이나 수치스러운 대외관계를 객관적인 사실에 비추어 기록이 불가능 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김부식은 중국의 황제가 죽으면 붕(崩), 삼국의 왕이 죽으면 훙(薨), 신하가 죽으면 졸(卒)이라 적고 있는데, 1972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김부식이 스스로 훙(薨)이라 낮춰 표현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