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론




고봉주/ 새마을운동 영광군지회 사무국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전장에 핀 데이지 꽃


2차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어느 한 전장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넘쳐나는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꼬박 사흘 밤을 지새운 간호사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눈을 붙였다.


오랜 기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봐왔기에 포성소리도 예사롭게 들릴 뿐 잠을 자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는데 간호사들이 거처하는 작은 막사의 침대 한쪽에서 쪼그려 누운 그녀의 왼쪽 가슴에는 군청색 잉크로 ‘데이지’라고 적힌 단정하고 작은 명찰이 붙어 있었다.


그녀가 눈을 붙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부산한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나와 보니 중상을 입은 병사가 후송되어 있었다.


그는 다리와 가슴에 치명상을 입었고 출혈도 심해 거의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으나 의식을 잃지 않고 다 부르튼 입술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는 죽겠지요? 곧∙∙∙∙∙.”


“아, 아니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도 기도할게요.


마음을 굳게 하고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함께해 달라고.”


결국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그는 중상자들의 막사로 옮겨졌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날마다 그랬던 것처럼 의사의 처방대로 약과 주사, 붕대 등을 준비하여 부상자들이 있는 막사를 돌았다.


그리고 전날 수술을 받은 군인의 침상까지 왔을 때 그 병사는 깨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많이 아프시지요. 하지만 수술은 잘 되었어요.”


“아, 하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어쩌죠, 진통제도 부족하고∙∙∙∙∙∙. 사실 그냥 견디는 것이 좋아요.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병사님도 기도하세요. 많이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에요.“


살이 찢기는 고통을 참느라 애쓰면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 무슨 기도를 한다 말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릴 그런 싸구려 동정은 필요 없단 말이오. 주사나 놔 주시오. 아니면 술이라도 주시오. 마시고 고통을 잊게 말이오!”


“아,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분명 기도는 합니다.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사람을 위해 10년 동안 기도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가 간호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어찌 기도하는 것을 잊겠습니다.”


 “∙∙∙∙∙∙.”


병사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막 여학생이 된 열세 살 때였어요. 멀리 사시는 어머니의 친구가 여행 중에 들리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그분께 인사시켰어요. 그분은 저를 보시더니 다짜고짜 제 손을 붙들고 옆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유! 너는 그렇게 착하다더니 예쁘기도 하구나.


나도 꼭 너 만한 아들이 있는데, 사춘기가 빨리 온 건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짓을 일삼는단다.’ 하시며 우리 어머니께 ”참 좋겠다, 부럽다‘를 연발하셨어요.


그때 저와 어머니는 그분께 아드님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답니다.


그리고는 이날까지 어머니 친구 분과 그 아드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병사는 그녀의 명찰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혹시 어머니의 친구가 조나단 부인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다. 그녀가 10년 동안 기도했던 그 병사가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던 조나단 2세였던 것이다.


 


남을 위한 기도


몇 년 전 한 지인으로부터 지역 선배라는 분을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서로 통성명이 오가던 중 갑자기 그가 필자를 향해 놀라는 눈빛을 보내더니 혹시 ○○○ 그 사람이 맞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맞다고 했더니 그는 필자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서는 놀라운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어떤 사람을 위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봐 오면서 도대체 누구일까 무척 궁굼하기도 했으며 또 얼마나 크고 소중한 사람이길래 이리 오랜 동안 기도를 해 줄 수 있는지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만났다며 잡은 손을 놓지를 못했다.


순간 필자는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IMF 당시 아무런 경험도 없이 해외에 묻지마 투자를 했다가 사업실패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풍지박산이 됐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스러울 만큼 주변 분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답지를 했던 때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분들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 필자는 가정을 잃지 않고 작지만 행복하다고 여길 만큼 재기를 했다.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처참함 속에서도 전자의 병사처럼 필자가 쓰러지지 않고 재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해 주셨던 목사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적인 일을 적었다며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겠으나 오늘 필자는 이 지면을 빌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정한수(정화수)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선친께서는 토방마루 한 켠에 작은 나무상자로 단을 만들어 매달고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치성을 드리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일 새벽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집안에 우물이나 수돗물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마을 어귀의 공동우물터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부친께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두 잠들어 있는 첫 새벽에 물을 길러 오셨다.


특히 물을 풀 때도 양동이 입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신성한 기운을 받고 올라온 물을 길러 오셨는데 집에 돌아오시면 제일 먼저 깨끗한 그릇으로 한 그릇 퍼서 치성대에 올려놓고 기도를 하셨다.


그 치성은 아버지께서 자리에 누우실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주인 잃은 치성대는 자리에서 치워지고 말았다.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오랜 시간 부친께서 치성을 다 했어도 단명으로 생을 마감하게 했던 하늘에 대한 원망이 스며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생전에 하시던 부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필자는 오늘에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한평생을 남의 집 품삯군으로 사셨기에 자식 하나도 큰 학교에 보내지 못했음을 항상 괴로워 하셨던 부친께서는 무슨 기도를 하셨던 것일까?


자식의 무운과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오랜 정성이 있었기에 필자는 또한 오늘을 무탈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쓰러질 것 같으면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은 바로 아버지의 오랜 치성이 아니었을까?


 


다문화가족을 위한 기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 남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그 기도는 꼭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사님이나 아버지의 기도처럼 오랜 기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아름답고 풍족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글로벌 경제위기 탓인지 요즘들어 부쩍 힘들어하는 다문화가족 이주여성들의 안타까운 삶을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가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몇 자 적어 보았다.


필자역시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간절한 기도밖에 없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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