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기/ 법성면 삼당리

<659호에 이어> 1955년 우리 마을에 전기불이 들어왔다. 왜정 때 농용수 개발을 위해 을진 양수장을 설치 하느라고 마을 근거리에 전기 배전선이 지나간 까닭에 다른 농촌마을 보다 유리한 입지조건과 광활한 농지에서 얻어지는 많은 조곡 수확에 살림에 여유가 생겨 당시로서는 엄청 크게 여기는 한 집에 나락 55kg드리 6가마씩 40호가 출자해서 전기시설을 했다.

법성포네 다음으로 외촌 어느 마을보다 먼저 석유등잔불을 없애고 밝은 전기 불을 사용하게 되었고 마을이 점점 흥성해지니 부농의 기계 산업화가 발달 되어 갔다. 논밭 가리에 필수적 황소증식과 농작물 쓰레기 처리에 돼지 그리기 전기 불 밝으니 밤에도 기계 새끼 꼬아 가마니 짜기 많은 면적 곡식 가꾸려니 일손이 턱없이 부족으로 일년 머슴구해 농사 준비를 하는데 대농가 집에서는 쟁기질 상일꾼 중 머슴 깔땀살이등 여러 명 중농가 집들을 향해 25명가량의 외지 젊은 인력을 일년 계약으로 새경을 평균 나락 15가마씩을 주고 한 가족이 되어 농사일에 전념하며 인근마을에 통고지<맡아서 해주는 일> 그리고 낱 고지주고 농번기에는 외부지역 날품팔이 노동력을 이용하고 심지어 초등학교 고학년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되어 그 많은 면적을 경작 하다 보니 주야로 한가로이 한번 쉴 틈 없이 일거리가 많다. 땅에서는 뿌린 데로 거둔다는 것이 철칙인지 가을 수확은 갈수록 풍요롭기만 했다.

1960년 박정희 대통령의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 삶의 현대화 새마을운동과 때를 같이하며 국도 22번선 용덕로 학산 앞 입구에서 마을까지 도로가 개설되고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재배하면서부터 보리잡곡밥을 멀리하고 하얀 쌀밥으로 우리들의 식탁이 바뀌면서 그립던 자녀 교육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마을에 중고등학생수가 30여명 대학생이 4명이 있었는데 일년 하숙비 등록금 책값을 하면 나락 55kg짜리 200가마<100석>를 가져야 어렵사리 대학 1년 교육을 이수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시대와는 달리 국민 생활 경제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농촌에서는 정말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념교육에 대학 4년간의 전 재산을 투자하다 싶이 했다.

그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집 자녀들은 초등학교 중학교의 졸업 나이에 서울로 생활 찾이 하나둘 출향했다.

1970년 급격한 인구 증가로 한 가정에 평균 6~7명의 자녀를 출산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정부에서는 산아 재한을 장려 식혔다.

지역마다 초등학교는 교실난으로 매년 학교 증축에 고심했고 어려운 생활을 감수하면서도 대도시로 유학 시키는 것이 부모들의 꿈이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선생님들도 권유하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이제 자녀 도시 유학의 붐이 일어났다.

경향 각지 학생들의 서울 전학을 막으려고 서울시민이 아니면 전학을 안 받아 주기 까지 하며 위장전입이라도 해서 서울로 전학을 시킨 사례도 많다. 배움에 굶주린 무식했던 부모들은 이렇게 자식들 교육열이 강하여 불철주야 학비 마련에 피나는 노력을 했다.

지난날 선조 때는 싼값에 흥성했던 토지 가격이 이제는 역으로 상승해서 토지를 구할 수 없어 생활이 어려운 가정은 자식들 데리고 눈물로 성공을 다짐하며 서울로 출향하는 반비례의 불공평이었다.

1980년 생산의 3요소가 토지, 노동, 자본인데 젊은이들은 배움터에 나가고 대농과 영세농은 한집 두 집 서서히 대도시 생활로 전업해가고 머슴구하기 어렵고 통모지 달라는 사람 없고 막노동 품팔이꾼 귀해지고 몸은 늙어가니 무거운 교육비 지출에 자연 살림살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중고등학교 재학생이 40여명 대도시 유학 고등학생이 15명 대학 재학생이 11명 미국 유학생 1명 독일유학생 1명 학사졸업생 6명 그래서 법성면 조사에 의하면 고학력 교육수준이 제일 높은 마을로 평가되었다.

시골 영농업 만으로는 무리한 교육비 지출이기에 부모형제들의 피나는 고생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90년 금융자산은 교육비 지출에 바닥이 나고 자녀들의 결혼비와 도시생활 방 마련에 평생생활의 터전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전답을 더 이상 경영할 수가 없어 팔거나 임내 농지로 주고 대도시로 세 가정네 가정 떠나기 시작하니 허술해진 빈집들이 동네마을의 미관을 보기 싫게 해친다. 한때는 영광군 내에서도 모범 부락 농촌마을로 이름났고 영화롭던 삼미네 마을이 지금은 너무도 황당하고 허술한 많은 빈집들로 안타갑기 그지없다.

2000년 마을 샘거리 당산 앞 승강장까지 하루 세 번 운행되는 영광군내 버스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병원왕진과 생필품 시장 보는데 진보한 발목이 되어준다.

하지만 자녀들을 모두 도시로 떠나보내고 인생황혼기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들이 허전한 넓은 집터를 지키면서 지난날의 추억과 현 황재선 박사, 황동순 박사, 황유순 박사, 황태형 박사, 황태용 박사, 황기선 판사의 후손들 이야기 꽃 피우면서 외로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도 자녀양육과 교육비 문제로 젊은이들이 심각한 저 출산 인구감소로 말미 아마 미래의 농촌과 국가 장래를 크게 염려하고 많은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더 참고 먼 앞날을 기다리자. 그래도 삼미네 마을은 억척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몇 젊은 이들이 기계화의 영농으로 그 많은 농지 면적을 차질 없이 모두 경영하고 있어 고맙고 다행스럽다.

언젠가 다시 한번 우리 마을이 크게 변화하여 과거의 영화롭던 그 시절이 한번 돌아와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끝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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