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택/ 영광문화원 부원장

[1] 한 푼을 쪼개 쓰란 애절한 말씀은 속살까지 파고드는 가난의 소치였습니다. 꽁보리밥 된장국이 그리도 맛 있었던 까닭은 모정으로 끓은 사랑의 전부였습니다.

흰 쌀 한줌 보리 위에 얹어 행여 섞어질까 조심조심 도시락에 담아 주시던 그 정성으로 곱게 곱게 자랐습니다.

고춧가루 한점 더 묻은 묵은지 가닥 아끼고 아껴 반찬으로 싸 주셨던 그 마음으로 어머님 얼굴의 주름살을 셉니다. 무명배 적삼에 삼복을 지내셔도 누덕누덕 꿰맨 자리마다 땀자국이 솟아도 올마다 입을 거친 우리들의 옷은 가늘디 가는 모시베가 아니었습니까

아프다는 자식 그도록 맘에 캥겨 날품으로 무거운 몸 자리 펴지 못 하시고 하얗게 밤을 지샌 그런 날은 몇 날이었습니까

봄, 가을 소풍이면 속치마 속에 속에서 접고 접은 10환짜리 한 장을 내 주시던 그 손길에서 우리들은 어머님을 배웠습니다.

오뉴월 긴긴 한나절 가락국수 한 그럭 쳐다만 보시고 오일 시장 돌고 돌아 어느 모퉁이에서 고르고 고르셨던 그 누우렁 참외는 맛으로 살아 지금도 어머님의 시장기 서린 지난 날들을 못 잊게 합니다.

[2]

소학교 6학년 때 두 홉짜리 소주 한 병 치마폭에 가리시고 교실 창밖에서 서성거릴 제 눈치 챈 우리 선생님
문을 열으셨지요

한 되 짜리가 아니라 내 놓지 못하시고 가시라는 선생님의 눈치도 못 채시고 저어 저어 그러다가 그냥 오셨다는 우리 어머님 그때 그 형편 두 홉의 소주는 봉승네 밭 매주고 하루의 품 삯으로 받은 것인 줄 우리 선생님도 알고 하늘도 알고 나도 알았어야 되는데

못 주고 못 주고 되돌아 서서 아들 교실 쳐다 보다 그냥 오셨던 그 짠함의 혓소리가 지금도 나의 귀에 쟁쟁합니다.

대문안집 영감네 큰 일 닥치면 항상 내일처럼 벼르시던 어머님 행장 윗목에 상 차려서 곱게 곱게 덮어 놓고 화롯불 다독여 시래기국 얹어 둬 가실 때도 계실 때도 모정을 남겨두신 우리 어머님 남 보기 사나우니
대문에서 기웃기웃 하지 말라는 가난해도 가난을 드러내지 말자던 속 아픈 말씀 으레, 저녁 늦게 돌아 오실 땐 치맛말 속에다 모정을 묻어 인절미랑 흰떡이랑 풀어 놓으시고 우리들 입모양만 보아도 배가 부르시다던 우리 어머님 가난해서 항상 물 속에 손을 담궈야 했지만 커가는 자식들의 바지통만큼 어머님의 마음도 따라서 크고 궂은 일 좋은 일 가리지 않아 고샅마다 피어나던 어머님 이야기 칠 팔 월 긴긴 더위 땀으로 멱을 감고 돌아 오셔도 적삼자락 흥건히 적셔 오셔도 콩밭에서 주어온 개똥참외는 차마 못 먹고 가져 오신 걸 나이 먹은 지금에야 알 듯 합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 못 갖다 드린 철 없는 그 때가 생각 날 때면 곱디 고운 어머님 얼굴 콩밭 깊숙이서 떠 오릅니다. 고생 고생 그런 고생 허리 한번 못 펴시고 한나절 가도 들어오시면 발길은 부엌이셨고 차리는 밥상만 먹어야 했던 소침한 행동에 지금도 마음이 애틋합니다.

등어리 땀띠에 몸이 쑤셔도 잠자는 자식 옆에 땀이 어릴까 호미로 저린 어깨 부채질로 밤이 새고 한밤중도 열 번 남짓 꺼지려는 모깃불에 매웁디 매운 눈물이 왈칵 솟아도 자식들의 콧소리는 높아만 졌던 그런 그런 생각들이 칠팔월 더위 오면 함께 옵니다.

[3]

가난한 살림에 태어났던 여덜 자식 한 끼 굶어도 배 고픔을 모르셨다는 우리 어머님 재산 복을 대신하여
자식 복으로 가난을 달래 놓고 남보다 일찍 아침을 열어 굵디 굵은 손마디가 마를 날이 없으셨던 우리 어머님 외가 식구들 찾아 올 때면 그래도 두레상 가에까지 흠 없는 대접에 지금도 어머님을 자랑하던 외가 식구들 추석 명절 다가오면 몇 날을 품삯 일로 밤까지 지새시던 어머님 모습

그 때 사 주셨던 한 켤레의 운동화 댓돌 위에 놓아 두면 행여 어쩔까 자다가도 나가셔서 들여 놓으시던 그 때의 처지를 이제야 참 마음 풀어 놓는 어머님 이야기 문수 몰라서 큰 것 산 것 아닌데도 크다고 투덜대던 자식들 아끼고 아껴서 내년까지 신으라고 사신 것인데…….

형이나 아우나 속 썩히는 건 마찬가지 많던 자식만큼 시름도 늘어났지만 한숨 한 번 크게 쉬어보지 않으시던 우리 어머님 손자 셋 놔두고 투덜대는 아들을 보면 지난간 일들이 생각 나시고 그럴 때면 조용히 입을 여시어 『그러는 게 아니여』한 마디 그 말씀에 떠오르는 지난 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다냐』영문도 몰랐던 그 때의 말씀 이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음을
깨달은 오늘 철없던 지난 날에 가슴만 탑니다.

[4]

열 일곱에 시집오셔 열 아홉 큰 딸을 보내는 마음이 그리도 아파 멀찌감치 혼삿날 받아 놓고 밤마다 눈물 닦아 내시던 그 애틋한 마음은 가난이 가져다 주는 서러운 눈물이었습니다.

보내야 하는 아픈 마음에 다 하지 못한 모정이 끓어 한 밤 한 밤을 손수건 적시던 동짓달 긴긴 밤 눈은 소복소복 내리는데 보기에도 다르게 차가운 눈 그것은 ―가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새 버선 한 짝 신어 보시지 못했지만 겨우 겨우 마련한 혼숫감엔 때깔 자르르 친정집 가풍 내세우는 어머님의 정성이 아니었습니까

수정과 식혜, 다식 없는 살림에 맛으로 살아난 어머님의 손맛이기에 두고 두고 시댁에서 시집살이도 편했다던 누님의 이야기는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해버린 오늘 이 시간에도 귀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다섯 딸 조르르 한숨으로 사셨지만 낳은 정 키운 정에 보낼 때가 오면 서럽지 않은 자식이 없었던 것은 딸은 탯자리부터 出家外人이라는 아들 가진 이웃들의 재잘거림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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