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요즘은 이웃간에도 걸핏하면 법정싸움을 벌인다. 법은 시비를 가려주고 피해를 보상 받을 수 있게는 하지만 다시 사이좋은 이웃으로 돌려 놓지는 못한다. 시비를 가려주고 다시 오순도순 살아가게 해주던 터주대감이 있는 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아름다운 여신이 칼과 안대와 저울을 들고 있다. ‘정의의 여신’ 이다. 법의 공평한 집행을 상징하는 이 여신은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칼을 들고 있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여신이 들고 있는 칼은 불법 앞에 정의를 실현하는 힘을, 안대는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공평해야 함을, 저울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 한다는 정의의 여신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신이 들고 있는 칼 때문이다. 칼이 정의를 수호하면 다시 없이 고맙고 소중하다. 하지만 현실은 권력과 돈을 지켜주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법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은 사람은 즉각 교도소로 보내지만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큰 폭의 융통성을 보인다. 너그럽기 까지 하다. 권력과 돈은 법의 맹점을 찾아 빠져 나가거나 솜 방망이 처벌로 면죄부를 받아 낸다.
법에 대한 이같은 생각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을 지켜보는 서민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자는 교도소로 직행하는데 천문학적 액수의 탈세와 불법 상속 등의 혐의가 있는 재벌 총수는 교도소 문턱에도 안갔다. 주가를 조작해 수백억의 이익을 보았다는 혐의가 있는 권력자에게도 법은 결국 빠져 나가는 길을 열어 면죄부를 주었다. 물론 이들은 대한민국의 내로라는 변호사로 구성된 ‘변호인 단’으로 법의 형벌로부터 보호막을 치고 있었다.
성경을 둘러 싸고 해석을 달리 하듯 법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법을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하는 이유다. 법을 귀걸이로 쓰고 싶으면 귀걸이로, 코걸이로 쓰고 싶으면 코걸이로 쓸 수 있는 것은 법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한 힘의 논리로 해석되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칼과 안대· 저울은 힘 있는 자들에게 ‘알고나 있으라’는 메시지에 불과하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은 진나라를 이긴뒤 모든 법을 폐지 했다. 유명한 ‘약법3장’ 만을 남겼다. 살인자는 죽이고, 도둑과 상해를 입힌자는 경중을 가려 처벌하며, 이외의 법은 폐지한 것이다. 복잡하고 많은 법보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이다. 결과는 그야말로 ‘살기 좋은 나라’ 였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법이 복잡하고 많았던 진나라 백성들이 ‘악정에 시달렸다’ 는 평가와 상반된다.
다툼이 있으면 동네 터주대감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르던 우리 시골 마을들도 요즘은 툭하면 법정 싸움이다. 돈 써가며 서로 원수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 풍조다. 법으로 시비는 가릴 수 있다. 분풀이도 할 수 있고 재산상의 피해도 보상 받을 수 있다.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준엄한 꾸중과 함께 양측이 다시 정다운 이웃으로 돌아가 오순도순 살수 있도록 만드는 터주대감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역마다 터주대감으로 모셔지는 어른들이 계셨는데 언제부터인가 모셔지는 분들도 모시려는 사람들도 사라져버렸다. 다툼이 생기면 법정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당연한 상식처럼 돼버렸다. 삭막해진 인심을 읽을 수 있다. 동네 터주대감과 함께 나라의 터주대감도 사라졌다. 동네든 나라든 지도층이 사라진 것과 다름 없다.
옛 벼슬아치들은 터주대감을 우대하고 의견을 경청 했다. 개인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은 터주대감이야 말로 살아있는 ‘법’으로 대접 받은 셈이다. 요즘 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 중에 지역 원로들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직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우선시 하며 사회를 끌어가려 할 뿐이다. 사법 연수원생들 마저 로 스쿨 출신을 검사로 임용하지 말라고 시위를 벌인다. 법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