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法聖浦) 둘레길 (상)

조아머리에서 대통제로

답사 코스는 ①구시미(조아머리) 나루터 ②통치낙조(通峙落照)의 현장인 대통재(待通峙)→③법성진성(法聖鎭城) ④숲쟁이 ⑤인의정(仁義亭) ⑥충혼탑(忠魂塔) ⑦인의산 둘레 길, 후장동(後匠洞) ⑧절터와 천북재(天鼓峙) ⑨한새바우 ⑩뒷개(後浦) 흰다리 ⑪자갈게미 ⑫당모탱이 무묘→⑬도래지를 지나 조아머리 까지이다.

 

“동짓재와 대통재가 감싸고 있는 포구”

법성포(法聖浦)는 인의산(仁義山) 자락이 서쪽으로 내리 뻗으며 숲쟁이 에 이르러 움츠렸다가 다시 법성진성(法聖鎭城)으로 되 솟아 남쪽 구미에 조선 중종 때 축성(1514년)된 일명 옹성(甕城)이라 부르는 법성진성(法聖鎭城)의 성내(城內) 마을을 만들고, 법성진성(法聖鎭城)에서 대통재(待通峙)에 이르러 조아머리 나루터까지 내리뻗어 또 다른 구미인 밖 다랑가지를 포함한 옥밭구미, 삶터를 만들었다.

한편, 동남쪽으로 내리 뻗은 내리막 능선은 동짓재(東嶺峙)를 지나 망재(望峙)에 이르고, 이 능선아래 생성된 구미에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를 당하고 1년 후인 1911년에 일본 후쿠오카현 사람인 오우찌(大內)가 호안(?岸)공사를 시작하여 2년 후인 1913년에 15,500여 평의 주거지를 조성하여 법성리(法聖里)로 개명된 마을이 탄생된다.

그리고 이 법성리(法聖里)는 1917년 6월에 가와사키(川崎)가 운영했던 전남농장이 지금의 고진아파트 지역(옛 법성중.고등학교 터)에 들어서면서 조선시대 법성포의 중심 권역이었던 진내리에서 법성리로 세력권이 급속도로 변모된다.

이렇듯 법성포(法聖浦)는 바다가 육지 속으로 움푹 파고들어 와 옻밭구미를 포함한 밖 다랑가지와 진내리(鎭內里), 그리고 법성리(法聖里)를 일구며, 한 때는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던 포구(浦口)다.

 

 

“법성고 남학생들이 참변을 당했던 구시미 나룻 길”

출발지점인 구시미-조아머리 나루터는 지금부터 57년 전에, 어선전복사고로 법성고등학교 남학생 11명이 참변을 당한 현장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을 표방했던 조선총독부는 소위 1면(面) 1교(校) 정책을 펴, 1932년에 이르러 영광군, 각 면에 한 학교씩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영광군내에 중.고등학교는 단 한곳도 없었다.

따라서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우리고장 사람들이 중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 외지로 유학하여야했다.

1908년에 4년제로 개교한 법성포초등학교는 1926년부터 6년제로 학년이 연장되어 1928년에 이르러 개교 이래 최초로 6년제,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상급학교 진학길이 열렸고, 이때부터 당시에 명문학교로 꼽히던 목포상업학교과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미군정 시절, 법성면 초대면장을 역임하신 신명철(申明哲) 선생이 6년제, 제1회 졸업생인데, 이분은 법성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에 진학하여 1929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셨던 분이다.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라 하였듯이, 자녀 교육열이 남달랐던 법성포 사람들은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마자?과거 일본사람들의 전남농장(川崎농장)의 부지와 건물을 이용하여 중.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1946년 6월 22일, 5년제 실업계(수산과 와 상과)학교로 당국의 인가를 받아 법성포실업중학교(현 법성중.고등학교 전신)를 개교하였다.

그리고 5년 후, 교육법개정으로 법성포실업중학교는 1951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어 각각 3년제로 바뀌고, 학교 이름도 법성중학교와 법성상업고등학교로 바뀌는데, 분리 2년 만에 법성상업고등학교는 재정난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립학교였던 법성중학교와 법성상업고등학교는 지금과 달리 국고보조가 전무하였고, 오직 학생들의 공납금에 의존하여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형편이라 학생 수가 많은 중학교는 재정형편이 그런대로 학교운영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학생 수가 적은 고등학교는 교사들의 봉급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야할 형편이었다.

결국 중학교와 통합하여 학교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로 하고 상업고등학교가 폐교되는 위기는 면했지만 학교재정은 여전히 열악한 상항이었다.

이에 따라 어려운 학교 형편을 돕고자 학생들이 나섰고, 일차로 교실 난방을 위한 겨울용 땔감을 비축하기 위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로 했다.

이날이 1953년 11월 10일이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과 전교 여학생들은 홍농 산으로, 나머지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은 백수 구수산에서 땔나무를 하였는데, 구수산에서 땔나무를 해 가지고 오던 남학생들이 이날 오후 4시경, 백수 구시미 나루터에서 조아머리 나루터로 건너오기 위해 학부형들이 제공한 발동선을 이용하여 건너오다가 배가 전복하여 사망 10명, 실종 1명, 모두 11명이 참변을 당했다.

1953년 11월 21자 자유신문에는 사망 8명, 실종 3명이라 하였는데, 실종 3명 중 2명은 시신을 수습하였고, 한 명만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학교재단 이사장을 맡고 계셨던 할아버님은 이 사고의 충격으로 2년 여 동안 문밖출입도 못하신 채, 병석에 계시다가 향년 64세로 끝내 생을 달리하셨다.

이때가 내 나이 13살 되던 법성포초등학교 졸업을 앞두던 해,

1956년 1월 8일,? 음력 1955년 11월 26일, 을미(乙未)년 무자(戊子)월 갑술(甲戌)일이다.

법성중.고등학교 최초의 학교장(學校葬)이었다.

 

 

“처녀(處女) 고혼(孤魂)을 위령(慰靈)한 객주비”

일제강점기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조석, 객주(客主)비가 이곳 조아머리 나루터에 있다.

비에 얽힌 사연 없이 그저 “법성포(法聖浦) 객주(客主) 박경삼(朴敬三) 운운”이라고 만 쓰여 있는 이 비는 조아머리와 구시미를 왕래했던 나룻배가 호경기를 맞았던 1980년 대 이전만 해도 이 비에 얽힌 사연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곤 했었다.

전래되는 이야기로는 이 비를 세운사람은 100여 년 전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어린나이에 뱃사람이 되었고, 배에서 밥 짓는 일이 주 임무인 화장(火匠) 직을 맡아 고기잡이배를 타고 칠산어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사람이 탄 배가 가마미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배가 육지에 정박했다가 다시 바다로 나갈 때는 바다에서 먹는 물은 생명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먹는 물을 보충하여야 하고, 이 일은 화장의 임무였기 때문에 이 날도 물을 긷기 위해 물지게를 지고 가다가 해변에 떠 밀려온 한 구의 익사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물지게를 내려놓고 가까이 가보니 이 시체는 누워 잠자는 미모의 여인이었고, 욕정을 이기지 못한 이 화장은 그만 모래 요를 깔고, 하늘을 이불삼아 죽은 여인을 간음하고 말았다. 그리곤 정신을 차려 곰곰이 생각하니 “비록 죽은 여자일망정 난생처음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는데, 이대로 두고 갈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에서 이 처녀의 시체를 거두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이 화장은 자주 꿈을 꾸게 되었고, 꿈에 나타난 이 처녀의 현몽(顯夢)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어는 날 꿈속에 이 처녀가 나타나 마지막을 고하게 되었고, 꿈에서 깬 이 화장은 몽중(夢中)처녀(處女)와 꿈속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두 곳, 이곳 나루터와 목냉기 등대 아래, 에 비를 세워 외롭게 방황할 처녀(處女)의 고혼(孤魂)을 위령하고 법성포구를 드니 드는 배들의 무사항행과 풍어를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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