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엽 용인 원삼중 감독

전국소년체전에 이어 추계연맹전도 우승해
우승제조기로 한국 축구에 우뚝
영광사람 이태엽 용인 원삼중 감독이 올해 전국대회 2관왕에 오르면서 한국축구계에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더했다.
이 감독은 지난 달 25일 경북 영덕고에서 열린 추계중등연맹전 결승전에서 전남프로축구 유스팀인 광양제철중을 누르고 감격의 우승컵을 안았다.
원삼중은 지난 5월 진주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육대회 중등부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전국대회 2관왕에 오르면서 이태엽 감독의 지도력이 검증되었다.
이 감독은 지난해 1월 용인시축구센터 소속 원삼중 축구부 감독으로 4년 만에 다시 중등축구무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제1회 여주세종대왕배 우승을 시작으로 오룡기대회 준우승에 이어 전국 왕중왕전에서 준우승을 거머쥐면서 2011년을 예고했다.
이 감독은 2000년 1월 서울 장안중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아 천안 오룡기대회 우승을 비롯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위 입상을 거두면서 능력 있는 지도자로 빛을 밝히 하기 시작했다.
이 감독의 지도능력을 인정한 호남대에서 2007년 감독직을 요청해 부임한지 10개월 만에 전국대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전국춘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준우승에 입상하는 등 중등부가 아닌 대학 판에서도 그의 지도력이 통했으나 학교 재단 측과의 불화(?)로 2009년에 사임했다.
2009년에는 상무프로축구단의 전략분석관으로 활동하면서 상무 팀이 연승을 기록하는데 일조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한 용인축구센터에서 원삼중 감독을 맡아줄 것을 요청해오자 2010년 1월부터 팀의 조련을 시작했다.
그 결과 원삼중은 전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팀으로 가장 무서운 팀으로 변신했다. 그 중심에는 이태엽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금호고와 서울시청 전성기 주역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영광명예를 높여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600번지의 이건주 씨 장남으로 태어나 영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재주가 많아 초등 3학년 때부터 학교 악단장을 맡았으며, 5학년에는 육상과 축구선수로 발탁돼 활약했다.
초등 축구선수로 대전 소년체전에 전남대표로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이름을 떨쳤으며, 해룡중 시절 영광로타리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축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룡고 1학년 때인 75년 광주 금호고 창단 감독인 서현옥(現 호남대 감독)감독으로부터 창단팀 입단을 요청받아 테스트를 거친 뒤 금호고로 전학해 팀 창단멤버로 본격적인 축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태엽은 빠르기는 하지만 시골 ‘촌놈축구’를 벗어나질 못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문적인 축구 수업을 거친 다른 선수들을 도저히 능가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하루 4차례씩 피땀 나는 훈련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하루가 모르게 기량이 좋아졌다.
76년 고교춘계연맹전에 출전한 금호고는 창단 2년 만에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금호고는 여름 부산 MBC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고 가을에 부산일보 주최의 청룡기대회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이태엽은 센터 포워드로 기용되어 가장 두드러진 유망주로 어필되었고 금호고의 핵심적인 공격수로 발판을 굳혔다.
금호고를 졸업하면서 당시 한국 축구계를 호령하는 서울시청의 박종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77년 서울시청 축구단에 입단했다.
이태엽은 당시 신장 181cm, 체중78kg 거기에다 11초7의 스피드를 자랑하면서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빠르고 골 잘 잡는 신예로 눈길을 끌었다.
80년대 들어 가장 기대되는 유망주로 서울시청의 백넘버 10번 이태엽 이다.
이태엽은 서울시청의 박종환 감독이 길러낸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스트라이커로 각광 받았다. 당시 서울시청의 평균득점 40%를 기록하는 천부적 골 게터로서 단연 상대팀의 위협적 인물이었다.
이태엽의 슈팅은 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골문을 조준하는 것이 특징을 가지고 실업 2년생의 초년병으로 춘계실업연맹전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조리 따돌리고 당당 최고 득점상을 획득하는 등 80년대 들어 가장 진주처럼 빛나는 플레이어로 각광 받았다.
80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현재 FA컵으로 전환 )최우수선수상과 81~82년 Korea Serise 최다득점상 수상까지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대표팀에서도 맹활약으로 펼치며 81년 체육특기자 병역특례법 혜택을 받아 국가로부터 군 면제 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태엽은 국가대표 2진인 충무팀에 선발되어 킹스컵대회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일취월장해 당시 국가대표 화랑팀의 스트라이커 부재 해결책으로 80년 5월 국가대표 1진 화랑팀에 승선하였다.
이태엽은 79년 국가대표 충무(대표 2진)팀에서 태극마크를 단데 이어 80년 화랑(대표 1진)멤버로 아시안컵, 대통령배축구대회, 메르데카국제축구대회, 한. 일정기전 등에 출전하며 83년까지 대표팀 1진으로 활약했다.
이태엽은 83년 슈퍼리그 출범과 동시에 서울시청에서 국민은행으로 이적 3년간 프로무대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크게 빛을 내지 못하고 85년 돌연 은퇴, 88년 목포항운노조 축구단 코치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지도자 생활에 젖어들지 못하고 이후 약 10년 이상 그라운드를 떠나 개인사업으로 아쉬운 시간을 보냈다.
“영광축구 발전에 관심가지고 언제든지 협조할 터“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태엽은 2000년 1월 서울 장안중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장안중축구부를 맡아 장안중은 전국의 강호로 떠올랐다. 서울 지역대회는 물론 전국대회에서 기존 실력파 학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승리를 기록해 나갔다.
이태엽 감독은 장안중을 시작으로 호남대 감독을 지내고 상무프로팀을 잠시 거친뒤 원삼중 감독으로 돌아왔다.
이 감독은 지난해 왕중왕전 결승전 경기의 패배를 기억하고 있다.
이 감독은 “강압적인 지도 방식을 피하고 자율적인 훈련 방법을 실시하되 탄탄한 기본기를 중시하면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면서 “촘촘한 수비력과 공간을 창출하며 넓게 전개하는 공격력, 슈팅에 버금하는 강력한 패스를 구사하는 콤팩트한 축구를 지향하고 싶다”라고 자신의 지도철학을 말한다.
이어 “영광이 전국축구계애 이름이 알려지고 있어 자랑스럽다”면서 “영광축구발전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발전을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태겠다”고 고향사랑을 전한다.
이 감독은 2002년부터 4년간 한국중.고축구연맹 기획이사를 맡아 학원축구 행정 경험도 쌓았으며, U-15서울시대표팀 감독과 U-14중등연맹 대표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0년 KFA(대한축구협회) 1급 지도자 라이센스, 2008년 7월 AFC(아시안축구연맹) A급 지도자 라이센스를 획득,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도자로 타의 귀감이 되고 있다.
화려한 선수생활, 이제는 지도자로서 한국축구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이태엽 감독의 미래가 기대된다.
이태엽(李太燁) 선수는
-1959년 6월 16일 영광대마 남산리 600번지 출생
-영광초교(60회)-해룡중(2회)- 광주 금호고- 서울시립대-호남대학교 체육대학원 졸업
-79년 국가대표 화랑팀 선수 활동
-80년 춘계실업연맹전 최다득점상 수상
-81년 종합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81-82 코리안시리즈 최다득점상 수상
-82년 11월 체육훈장 백마장 수상 등 각종 국제대회 입상
-85년 5월 목포 항운 실업팀 감독 3년간 역임
-2000년 1월 서울 장안중학교 감독 부임
-2002년 7월 천안오룡기 우승, 10월 인천시장기 우승
-2006년 10월 서울시 대표 감독 한일 정기전 8년만에 2전전승
-2006년 12월 중국 상하이 국제 15세 청소년 대회에 한국팀 감독 선임
-2007년 1월 호남대학교 축구부 감독 부임
-2007년 제62회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호남대학교 6년만에 우승 최우수감독상
-2009년 프로축구팀 광주상무 전략분석관 및 코치
-2010년 용인시축구센터 원삼중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