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지난 한해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맞서야 했다.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의 투쟁을 벌인 김진숙, 일본 원전에 의한 삶의 파괴,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 3류정치는 죽어야 한다는 국민의 여망, 학교폭력에 의한 새싹들의 죽음, 그리고 김정일의 사망 등이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새해가 되길 기대한다”

셰익스피어는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 역사상 이를 피해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러 죽음을 향해 갈 필요는 없다. 삶을 탐닉하라”고 했다. 대 문호 다운 통찰력이다. 한해를 보내면서 문득 셰익스피어의 이 말이 떠오른다. 올 한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해보다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의 죽음 은 물론이고 나, 혹은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 한해 이었다.

한진 중공업 노사문제로 김진숙씨가 크레인 위에서 열 달이 넘는 309일간의 시위를 했다. 공중에 매달린 크레인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공권력에 흔들리는 그녀를 보며 국민들은 그녀가 살아 내려오기를 간절히 소망 했다. 그녀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줄을 이었다. 핀란드와 노르웨이 등에서 온 외국인들도 그녀의 생존을 빌며 희망버스에 함께 했다. 결국 거대한 공권력과 재벌기업도 여성 근로자의 목숨을 건 투쟁에 손을 들었다.

김진숙씨는 죽기 위해 크레인 위의 고독한 투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죽을 수도 있는 길을 간 것이 아니고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삶을 탐닉’한 것이다. 그녀의 ‘희망’은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었고 결국 수많은 근로자들에게 ‘삶을 탐닉’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겼다. 삶을 탐닉 하려다 목숨을 잃은 용산 철거민이나 ‘홍대 청소부’ 들에게도 희망을 안겼다. 김진숙씨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약자들의 승리 이었다.

김진숙씨가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투쟁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났다. 일본의 동북부가 초토화 되고 방사능이 유출 됐다. 자칫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생존을 위협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린 에너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원전 강국’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할 때 터진 일본 원전의 사고는 ‘원전 공포’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가고 있지만 일본 원전의 공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김진숙과 원전에 의한 죽음을 걱정하는 판에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엄청난 수의 살아 있는 소와 돼지·닭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인간이 살기 위해 살아있는 가축이 생매장 당하는 죽음의 공포를 맛봐야 했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생명의 위협은 정치인들에게로 옮아갔다. 안철수 교수의 등장이 계기가 됐다.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철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당선은 정치권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 했다.

살아남기 위한 여야의 몸짓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하지만 아직 국민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의 치열한 몸짓은 뿌리부터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쇄신은 ‘친박계’가 ‘친이계’의 주검을 딛고 살아남으려 하는 것으로, 민주통합당은 텃밭에서 힘 안들이고 ‘해먹던’ 정치인들이 건재할 것으로 보이니 바뀌는 척 하다가 ‘3류정치’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어서다.

죽음이 연상되는 사건·사고의 파문 속에서 맞은 연말에는 민족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김정일 사망 이라는 ‘대형사건’이 터졌다. 남북을 망라한 모든 동포들의 미래가 바뀔 수 있는 죽음이다. 불안과 기대가 교차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정권과 ‘동거’하지 않으면 안 되고 통합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비극적 상황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는 사건이다.

‘도가니’에 이어 학교폭력에 의한 어린 생명들의 잇단 희생이 연말의 대한민국에게 또 한 번 죽음을 서두르지 않고 삶을 탐닉하는 공동체 구성 이라는 과제를 던졌다. 2011년에 대한민국의 병폐는 모두 드러나고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변화가 2012년에 거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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