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경문/ 전남지적장애인복지협회 영광군지부장

새해 첫날 한통의 문자가 왔다. 나이 한 살을 배달한다는 유머러스한 내용이었다. 나이 한 살을 배달하면서 반품도 안 되고 거절도 안 되고 타인에게 양도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나이를 상품처럼 빗대어 쓴 글을 읽으며 처음엔 재밌었는데 읽다보니 빠르게 지나는 세월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인지 어린 시절 행복했던 때가 많이 그리워진다. 특히 설 명절이 다가오면 어릴 적 기대와 설렘으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냥 즐겁고 신나게 설 명절을 보냈던 그 때가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설 명절 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대목장인데 5일장 중에서도 일 년에 두 번 뿐인 대목장은 구경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지는 해가 아쉬운 축제장이다. 객지에 나간 자식들과 귀여운 손주들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이 고픈 마음에 하나 하나 정성들여 물건을 고르는 어머니들, 방앗간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금방 나온 쫄깃 쫄깃한 가래떡은 입에서 살살 녹아 먹고 있으면서도 또 먹고 싶고, 명절 때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과일과 약과와 전병들은 장날 사놓고도 창고에 넣어 명절 당일 날에 개봉 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국수 한 그릇, 팥죽 한 그릇을 시장에서 먹고 나면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즐겁고 신났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전부치는 냄새가 가득했고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가장 큰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서로 나눠 가지기도 했다. 떡을 치며 힘자랑을 하던 아저씨들과 위험해 보이는데도 아슬아슬하게 박자에 맞춰 뒤집는 아주머니들의 손 기술이 대단해 보였다. 집안에서는 전부치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을 들락날락 하면서 손으로 한번 두 번 집어 먹다가 어머니께 꿀밤도 많이 맞았는데 그 꿀밤까지도 달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명절이 되기 일주일전에는 부모님이 사주신 새 옷 새 신발을 머리 위에 두고 설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꿈속에서 미리 옷을 입어 보기도 했다.

동네 집집마다 타지에 나갔던 가족들이 모이고 동네 여기저기서 윷판이 열리고 마을 노래자랑도 열리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모두 모여 웃음 꽃, 이야기 꽃이 만발했었다.

설날아침에는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께 세배를 하며 만수무강 하시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세뱃돈을 얼마 주실까? 한 살 더 먹었으니 작년보다 많이 주시겠지? 외갓집에 이모랑 삼촌들은 왔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고 형과 누나보다 덜 받았을 때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어릴 적 설날은 천국이고 행복이었다. 가진 것 없어도 마음은 항상 넉넉한 부자였고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 하고 나누고 퍼 주어도 항상 풍성하던 그 때. 마을 사람 모두가 가족이 되어 먹고 즐기며 아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었던 그 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지금의 설 명절은 어떠한가....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고향에 내려갈 시간도 부족해 오히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가는 풍토가 생겼고 편한 것만 추구하다보니 명절 음식도 모두 사서 상에 오르기도 한다. 정성이 깃든 선물은 온데 간데 없이 돈 봉투 하나 건네 드리면 끝이고 귀여운 손주들은 컴퓨터가 없어 그저 심심할 따름... 아쉬운데로 TV만 하루종일 붙잡고 있다. 나이드신 부모님은 무릎도 안 좋으시고 날도 추우니 집에 계시라하고 영화관이나 노래방 호프집에 가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이보다 더 심각한 건 명절 연휴를 이용해 해외 여행가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것이다.

민속 고유의 명절이 학교 안가고 회사 안가는 휴일 쯤으로 되어버린 삭막해진 명절! 가장들은 돈 지출이 많아지니 불편하고 주부들은 명절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고생하려니 불편하고 회사에서는 보너스에 선물 하나씩 주려니 불편하고 앞 뒤 꽉 막힌 도로에 10시간 이상 서있으려니 불편하고 모두가 불편한 명절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실은 홀로사시는 어르신, 장애인가정, 가정해체로 인한 조손가정, 소년소녀 가장, 미혼모, 이주 노동자, 이주여성 등 설날이 더 외롭고 힘들게 느껴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장애인시설을 15년 정도 운영하면서 경험한 설 명절은 고요함 적막함 뿐이다. 평소 활발하고 시끄럽게 떠들던 장애인들도 무기력해져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가족이 없는 이들, 가족이 있어도 찾아와 주지 않는 이들이다. 가족들이 와서 집에 데려가기도 하고 집에는 데려 가지 못해도 잠깐 들려 음식과 옷을 선물해주고 가는 가족들도 있지만 아예 일년 내내 왕래 한번 없는 가족들도 있다. 가족들이 없는 시설 거주자들은 옆 친구가 마냥 부러울 뿐이다. 가족들과 오순도순 즐겁게 이야기하고 놀며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들은 외로운 마음을 더욱 외롭게 할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 코 베어 간다는 시대에 사는 바쁜 현대인들.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좋겠다. 돈과 명예 지위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길 바라며 잃어 버렸다면 다시 찾길 바란다. 앞만 보며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족의 눈을 바라보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눈을 바라보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하고 가난해도 볼품없어도 답답해도 불편해도 내 가족 내 고향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이웃과 함께 같이 먹고 나누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의 회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도 많은 이들이 우리 고향을 찾아 올 것이다. 어릴적 고향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포근함과, 함께 나누며 웃고 즐거워 했던 이웃의 정을 느끼고, 오는이나 가는이나 모두에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설 명절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불행 근심 걱정 외로움 슬픔 아픔은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임진년 한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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