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원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농촌, 그것도 공동체에서 생활하다 보면 아래와 옆을 살피는 일에는 성실할 수 있으되, 앞을 보고 미래를 구상하는 일에는 소홀하기 쉬운 듯하다. 물론 짧은 경험이라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말이다. 분명한 건 비슷한 철학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 함께 살면서 누리는 편안한 장점도 많지만, 자칫 ‘동종교배’가 낳을 열성(劣性)의 위험도 크다는 점이다. 다소 엉뚱한 비교지만, 제 아무리 위대한 석학이나 사상가라 할지라도, 감옥 독방에 오래 갇혀 있다 보면 속이 좁아지고 사소한 차이에도 삐지고 다투기 마련이다. 두 번 징역살이를 하면서 쉽게 발견하고 체험한 바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해선 무엇보다 공동학습과 집단토론이 중요하다. ‘가난’과 ‘인간다움’과 ‘존엄’에 대해 늘 궁리하면서 공동체를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을 키우는 일, 그건 바로 공부의 힘이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태어난 공부모임이 ‘월요학당’이다.

잠시 여민동락을 거쳐 산골농부가 되겠다고 새로운 길을 떠난 부부가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간 말이 있다. “여민동락은 너무 전투적입니다.”

그렇다. 여민동락 생활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농촌살이도 그렇거니와 공동체 활동 또한 먼 산 지켜보고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팍팍하기 그지없다. 밥도 먹고 꿈도 이루는 일이란 게 본래 쉬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 회사처럼 경영과 경제에 탁월한 사람도 없다. 농촌과 복지를 전공해서 전문가를 자처할 만한 경력자도 드물다. 대강 알려졌듯이 여민동락공동체는 이십 대를 저마다 깐깐하게 살다가 ‘좋은 뜻’만 가지고 만난 사람들의 집합소다. 그러다 보니 경험도 없이 어찌 철학만을 가지고 마을기업을 비롯한 경제사업을 순식간에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며, 농촌복지하면서 행정사무니 재무회계니 꼼꼼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제대로 된 농사꾼 하나 없이 만 평 농장을 주민들의 지혜와 노동을 빌어 짓고 있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용감(?)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다.

그래서인가. 몸으로 살고 세월을 통해 배우는 이들에겐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매순간 분주할 수밖에 없다. 남녀 할 것 없이 어르신들을 모시는 운전을 해야 하고, 점빵도 봐야하고, 할매손 송편공장 떡도 만들어야 하고, 주말이면 농장일도 협동해야 한다. 사회복지사이자 운전기사이자 점빵 주인이자 떡집 일꾼이자, 때로 얼치기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알고 보니 정말 ‘전투적’이다.

전투적일수록 필요한 게 건강생활과 공부였다. 건강이야 기본이고, 공부는 곧 비전의 공유과정이다. 월요학당은 그런 점에서 여민동락의 소중한 마중물이다. 마치 대학시절 어느 노(老)운동가가 강조한 3대 전선의 중요성과도 같은 말이다. 건강전선, 생활전선, 사상전선을 잘 지키는 일, 이 세가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운동가의 기본자세라 했다. 세월이 지나도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아니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인 ‘인디고 서원’에 있는 ‘인크’라는 모임이었든가? 그들은 자신들의 공부모임 이름을 ‘사랑과 혁명의 공부공동체’라 했다. 표현이 딱 맘에 들었다. 여민동락의 싱크탱크인 월요학당 또한 그 지향이 다르지 않다. 농촌과 농업, 그리고 농민과 함께하는 사랑과 혁명의 공부공동체다.

현장에 기초하되, 끊임없이 이론을 세워가는 공부하는 공동체. 평가와 각성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속살을 살펴보는 성찰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을 키워가는 상상력공동체. 이것이 ‘월요학당’이 지닌 진정한 매력이다.

공부할 게 참 많다. 머리공부와 몸 노동이 구별되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만, 낮으로 노동하고 밤으로 공부하면서 공동체의 바탕을 잘 다져가야 한다. 장차 양생의 시간이 좀 지나면 공동체의 식구들을 넘어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가고, 곡성 죽곡면의 농민도서관의 인문학 아카데미처럼 농민학교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날이 오리라.

그럴 즈음이면 여민동락공동체가 ‘너무 전투적’이어서 견디지 못하고 새 길을 떠난 그 부부에게, 조금은 얼굴이 서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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