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이/ 영광신문 논설위원
추석이 가까워지면 산야 여기저기에서 예초기(乂草機)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강도(데시벨)를 측정하면 분명히 소음(騷音)으로 분류되겠지만 멀리서 듣다 보면 ‘누가 벌초를 하나보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잘하는 일이지.’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기계음이지만 산자락에 부딛쳐 메아리지는 소리는 오히려 들을만하기도 하다. 산새들도 처음에는 굉음(轟音)에 놀라 도망갔다가도 곧바로 풀이 베어진 자리에서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모여든다고 한다.
옛날에는 묘지기나 마름에게 사래전답이나 사래쌀을 주고 벌초를 시키거나 묘소 가까이 사는 친인척 또는 지인들에게 미리 벌초를 부탁하고 추석날 성묘길에 찾아가 사례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골에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모두 도시로 떠났고 마을을 지키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쇠약한 노인들 뿐이다. 최근에는 직업적으로 벌초를 대행해 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들어서는 ‘벌초·성묘 귀성 교통정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추석 3,4주 전부터 주말이면 벌초를 하거나 미리 성묘를 하기 위해 귀성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속도로에서 차량 흐름 정체 현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많은 시간과 경비와 피로를 감당하면서까지 벌초·성묘 귀성을 기꺼이 행하는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로는 ‘벌초와 성묘를 한번에 하기 위해서’ 또는 ‘벌초를 대행해줄 사람이 없어서’ 또는 ‘벌초는 주인이 해야 좀 더 꼼꼼하게 잘 할 수 있어서’등이 있겠지만 거기에는 ‘벌초와 성묘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표현은 못하고 있지만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와 성묘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근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스스로 축복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뜻이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전에도 늘 그렇게 해왔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한국인들 고유의 정신문화 유산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양문화에 동화되어 무한경쟁 속에 파묻혀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번잡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근본과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 스트레스를 치유(治揄)하고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힐링(Healing:治揄, 淨化)효과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종교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벌초·성묘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비효율적 행위라고 폄훼할지 모르지만 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오래된 풍습이라 어쩔 수 없이 쫒는다며 타의에 의해 소극적으로 벌초에 참여하거나 묘소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들에게서도 성찰과 자연이 주는 정화와 치유의 효과는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람들은 옛적부터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고 세상을 발전시키는 일 못지않게 근본을 회복하고 자연 법칙에 순응하려는 노력 역시 중요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순응과 근본 찾기의 행위를 통해 치유와 정화가 이루어져 자아가 재생되고 활력이 재충전 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원시반본(元始反本)을 강조해 온 동양사상은 ‘ 근본으로 되돌아가 되살리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되돌아 감’은 그냥 옛날로 시계 바늘을 돌려놓자는 것이 아니라 ‘되살핌’을 통해 정화와 치유를 이루고 새로운 에너지로 재정비된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귀향(歸鄕)과 동의어로 쓰이는 ‘귀성(歸省)’이라는 말이나 ‘묘를 찾아간다’는 말인 ‘성묘(省墓)’에 ‘되살핀다는’ 의미의 성(省)자(字)가 쓰이고 있음은 ‘원시반본’의 해석을 위에서와 같이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다.
몇 년 전부터는 ‘웰빙’이 열풍처럼 사회 트렌드로 부각되더니 요즈음 들어서는 힐링이 문화코드로서 대세이다. 웰빙이 신체적 건강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힐링은 정신적 건강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힐링에는 빠른 발전추구와 무한경쟁에 지쳐있는 현대인, 도시인들이 삶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요구와 기대가 반영되어야 한다.
힐링은 스트레스를 정화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으로 ‘느림’과 ‘되돌아봄’이 기본 성격이다. 때문에 자연친화적 공간인 농촌과 ‘되돌아봄’을 강조해온 전통문화는 힐링을 위한 자원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농촌체험관광, 고향축제참여, 명절귀성, 성묘·벌초참여, 템플스테이, 향교·서원탐방, 종교성지·순교지순례 등이 힐링비지니스 컨텐츠들이다. 이제 우리 지역도 어떤 방법을 통해야 힐링이 잘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에 따르는 서비스를 개발, 시행해야 한다. 힐링의 개념을 잘 수용하여 지역의 관광위상을 높이고 선진 문화지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중국 화교나 유태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힐링을 잘 하며 전통 가치를 보전하고 공간적·시간적 적응과 발전을 모색해 왔는지 조사해 보고 그를 벤치마킹하는 방안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