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원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이십리 길을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건너편 성황당 사 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추석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대목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풍경과, 동편에 뜬 달빛을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추석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묘사한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란 시다.
추석이 다가오면 조상님 산소의 벌초 하는 일이 가장 큰일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열병을 치르듯 불원천리 고향으로 달려와 벌초를 한다. “못난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고향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벌초를 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벌초는 만행만덕(萬行萬德)의 근간인 효(孝)의 한 실천 덕목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그 벌초를 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공통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조상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 거야”라고..., 세대별 가치관의 변화와 차이에 따른 기성세대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다 보니 추석 풍경뿐만 아니라 효의 사상에서 비롯된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제례(祭禮)나 상례(喪禮), 그리고 장례(葬禮)문화까지도 급변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집안의 모든 제사를 한날로 정하여 합제를 지낸다거나, 삼일장을 치르고 나면 바로 탈상을 한다거나, 후세들이 산소 관리를 제대로 못할 것을 예상하고 과거의 매장 풍습보다 화장(火葬)을 선택 하여 납골당에 영구안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노루 때린 주렁 막가지 삼년 우려 먹는다-
불과 한 세기가 못되는 세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조들은 효 사상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 실천을 중시했다. 그 중 하나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무덤 앞에 천막을 치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그 자리를 지키며 날마다 지극정성으로 살아생전의 부모님 대 하듯 똑같은 일상을 삼년간이나 해야만 했다. 그렇게 효를 실천하다보니 웃지 못 할 헤프닝도 발생했다.
어느 선비가 부친상을 당해 아버님 산소 앞에 천막을 치고 그 시묘살이를 시작하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 조반을 지어 올리고 묘 앞에 일어서서 곡을 하려는데 묘 옆에서 잠자고 있던 노루가 그 소리에 놀라 펄쩍 뛰어 올랐다. 그러자 노루보다 더 놀란 선비는 자신도 모르게 짚고 있던 지팡이로 뛰는 노루를 때려눕히게 되었다. 때마침 그 옆을 지나던 나무꾼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한마디 조소를 던진다. “흥, 말이 시묘살이지 그 핑계 삼아 노루잡고 있구만...”
“효도하는 차원의 시묘살이는 구실에 불과하고 노루를 잡기 위해 시묘살이 흉내를 내고 있으니 세상에 소문을 내겠노라”고 나무꾼이 선비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비는 자신의 효심에 누가 되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그 나무꾼의 입을 막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대로 무엇이든 다 들어주기 시작했는데 시묘살이가 끝나는 삼년동안을 그 나무꾼에게 끌려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무꾼은 효심이 지극한 선비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 엉겁결에 노루를 때려눕힌 선비의 시묘살이 지팡이를 삼년동안이나 울궈먹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효의 사상이 만행의 근간임은 분명하지만 현대 사회의 구조와 현대인들의 사고체계에 견주어볼 때 그 실천방법에 있어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많기에 저절로 변화와 진화를 모색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간직해야 할 것은 몇 수십대 위의 조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것 까지는 못하더라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 하나는 우리의 다음세대들도 가슴에 새겨야 할 중요 덕목이다. 부모님께 효를 생각하다보면 범죄를 저지를 일도 없고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기에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지고 더욱 발전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누구에게나 성묘를 하는 자리가 단순한 의례가 아닌 실용적 효의 가치에 대해서 숙고하고 후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