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6.29 폭탄선언, 대선 극적승리 만들어
성공적 ‘88올림픽 북방정책’ 국제위상 높여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성립된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첫 정부의 수반인 제13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1988년 2월 25일~1993년 2월 24일 재임)는 1932년 12월 4일생으로 현 79세이다. 아호는 용당(庸堂),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자녀는 노재헌, 노소영 등 1남 1녀를 두었다.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팔공산 근처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결혼 8년 만에 얻은 첫째 아들이라, 득남 전에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한다. 노태우는 조선 세조~성종 때의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의 15대손이라 한다. 이어 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
노태우는 1939년 3월 집에서 6km 거리의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직접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1946년 2월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후, 3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중학교 2학년에는 말라리아로 고생했으나 극적 살아남았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4학년 편입시험에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경북보통고등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상위 성적을 유지하였다. 노태우는 경북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의사를 희망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의사의 꿈을 포기한다.
육사 11기 출신…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노태우는 1950년 6.25 동란을 맞으면서 피난 갔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전장에 투입됐고,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의 헌병학교에 입학한다. 이로써 노태우는 정식 이등병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 이듬해인 1951년 10월 헌병학교 정규 1기생의 신분으로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였다.
노태우는 사관생도 재학 중 전두환·정호용 등을 만나 인맥을 형성하였다. 일찍부터 같은 대구 출신인 전두환과는 무척 친하게 지냈다. 노태우는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두환, 정호용과 함께 11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한다.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노태우는 그 해 전두환의 조력 하에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었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전두환 후임자로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 7월 15일 예비역 대장으로 서부전선에서 예편 후 정치권에 본격 입문한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이 되고, 그해 11월 대통령 특사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순방하였다. 이탈리아의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 방문을 간청하여 성사시켰다.
1982년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로 참여하였으며, 동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41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다. 1983년에는 서울 88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유보한다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노태우는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으나, 동시에 이날부터 전국적으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으로 제5공화국은 정치적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노태우는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했던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들을 전격 수용하고,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면서 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되었다.
6.29선언 핵심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김대중의 사면복권, 시국관련 사범들의 석방,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등이 총망라하고 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자, 노태우는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6·29선언 이후 여야는 개헌협상을 전개하여 5년 임기의 단임제 대통령을 직선하는 헌법을 마련하였으며, 12월 16일 새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인 1988년 2월 25일 취임한다. 이어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총선거를 거쳐 제13대 국회가 개원됨으로써 제6화공화국이 본궤도에 진입한다.
직선제로 뽑는 제 13대 대선에서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따로 출마하고 정계에서 한동안 떠나있던 김종필이 충청권을 결집시키며 등장하면서 야권의 자중지란 속에 여권의 노태우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야권의 3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극적 순간을 연출하였다.
총유권자 수 2587만 3624명 가운데 2306만 6419명(투표율 89.2%)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이 가운데 무효 46만 3008표를 제외한 유효투표 수는 2260만 3411표였다.
득표수는 노태우 후보가 828만 2738표(득표율 36.6%)로 1위, 김영삼 후보가 633만 7581표(득표율 28%)로 2위, 김대중 후보가 611만 3375표(득표율 27%)로 3위, 김종필 후보가 182만 3067표(득표율 8%)로 4위, 신정일 후보가 4만 6650표(0.2%)로 5위를 차지하였다.
노태우 정부 최대 업적은 ‘북방정책’ 꼽아
노태우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바로 단적인 실례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이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열린 지구촌 대축제 제24회 하계 서울 올림픽! 서울 올림픽은 자유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까지 참여했다. 이 대회는 세계 화합의 마당으로 높이 평가받은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국위가 크게 선양되었다.
무엇보다 노태우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단연 성공적 북방외교(北方外交)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북방외교는 1988년부터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권이 적극 추진해 온 중국·소련·동유럽국가·기타 사회주의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대 공산권 외교정책을 통칭한다.
북방외교는 중국·소련과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 국가와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모토로 추진되었다.
직접적으로는 공산권외교의 적극적 방향전환을 시사한 것이지만, 그동안 친서방 정책에 편중해 온 외교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북방외교는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하면서 구체화 되었다.
7·7선언 이후, 때맞춰 불어온 미·소간 신(新)데탕트 무드와 서울올림픽 개최, 대공산권 교역증대 등의 호조건에 힘입어 1989년 2월 1일에는 동구 공산권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식 수교하였으며, 1989년 7월까지 유고슬라비아 구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구권의 무역사무소가 차례로 설치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소련,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한·소 정상회담에 이어 9월 30일 뉴욕 국제연합본부에서 최호중 외무부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소 수교가 정식 이루어졌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중간의 정식수교가 결실을 맺었다.
1982년 몽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기간 동안 새로이 수교한 나라는 45개국, 그 인구는 17억 명이 넘었다.
노태우 정부는 통일 정책에서도 전향적 자세를 취했다.
1990년 9월 4일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 증진 등에 관한 기본 합의서'가 채택되면서 남북 대화에 중대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앞서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추진하려던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문화·체육 교류가 활발하면서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1991년 9월 18일 남한은 북한과 유엔 동시가입을 달성하였다.
현재 노태우 대통령은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이다. 저서는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