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건설-국회의원-서울시장-대통령까지
리더십 대위기 ‘대북관계․국가부채’ 적신호
제6공화국의 5번째 정부인 제17대 대통령(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 이명박(李明博)!
이명박 대통령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계(淸溪)이다. 이명박의 본적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의창면 덕성동 537번지이다. 그러나 실제 탄생지는 일본이다. 부친이 일제 강점기 가난의 굴레를 벗고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사용했던 일본어 성씨는 쓰키야마(月山)이었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제국 오사카 부 나카카와치 군 가미 촌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명박은 광복 직후인 당시 만3세 되던 해에 1945년 11월 귀국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 왔다.
이명박은 1970년 김윤옥(金潤玉, 1947년 3월 26일) 여사와 결혼했으며, 자녀로는 딸 이주연(1971년생), 이승연(1973년생), 이수연(1975년생), 아들 이시형(1978년생)이 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주)에 입사하여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인 35세에 최고경영자가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가 되었다. 그 뒤 1992년까지 현대건설·인천제철(주) 등 현대그룹의 8개 계열사 대표이사·회장을 역임했다.
이명박은 여당인 민주자유당 14대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19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前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명박은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1996년 5월 30일-1998년 2월 21일)에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내려놓는다. 이명박은 2000년 광복절 특사로 복권되면서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선거에 당선되어 동년 7월 1일 32대 서울특별시 시장에 취임한다.
이명박은 현 새누리당 대선주자 박근혜와 치열한 접전 끝에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으며,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인 2008년 2월 25일에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른다.
총 투표자는 2373만 2854명으로 투표율이 63%에 그쳐 직접선거로 치러진 11차례의 대통령선거 가운데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투표 결과는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1149만 2389표를 얻어 득표율 48.7%로 당선되었고, 정동영이 617만 4681표(득표율 26.1%)로 2위를, 이회창이 355만 9963표(득표율 15.1%)로 3위를 기록하였다.
정책 총론 ‘환상’ 각론은 ‘엉망’
이명박 정부는 ‘7% 성장, 4만 불 소득, 세계 7대 선진국’의 이른바 ‘747 성장’을 주목표로 내세웠다. 이명박의 이런 야심찬 어젠더의 성과는 미미할뿐더러 각종 정책추진에서도 잇단 파행을 노정시켜 국민들의 불신을 심대하게 받기 이르렀다.
이명박은 영남권 신공항, 반값 등록금 등등 야심찬 공약 사항들을 연거푸 뒤집으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의 대선 핵심공약인 '반값 아파트' 공약도 물거품이 됐고, 통신비 20% 인하 공약도 공수표로 전락했다.
이명박은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소통을 홀대하면서 일방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비판이 임기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2008년 5월 촛불 집회는 이를 극명히 노정시켰다. 소통홀대는 인권유린과 탄압으로 한층 증폭되었다.
프랭크 라뤼 UN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이병박 정권 4년차를 맞아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지난 2008년 이후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됐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작성한바 있다.
이명박의 언론통제 집착은 모든 권력기관을 동원해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쫓아낸 것으로 시작한 방송장악 기도와 비판언론에 대한 유·무형의 탄압과 압박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특히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폭로는 전 국민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008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찰한 사건이 MBC PD수첩에 보도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를 내건 뒤에도 ‘인사 불공정’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 고위직 인사의 ‘영남 쏠림’은 여전하며, 4대 권력기관장의 영남 편중은 도를 넘어선다.
‘한겨레’가 2011년 2월 21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 3돌을 맞아 정부 차관급 이상 101명과 청와대 비서관(1급) 이상 참모 64명 등 165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대구·경북(37명)과 부산·울산·경남(23명) 등 영남 출신이 36.4%(60명)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광역단체별로 보면 이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이 29명(17.6%)으로, 서울(32명, 19.4%)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는 숫자를 세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2012년 7월 10일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역대 현직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77) 前 의원이 저축은행 등에서 거액의 불법 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 전 의원은 ‘만사형통’, ‘상왕’, ‘영일대군’ 등으로 불리며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 노릇을 해왔다.
4대강 논란, 천문학적 국가부채
2008년 하반기부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정비 사업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에 2012년까지 총 14조 원을 투입해 노후 제방 보강과 하천 생태계 복원, 중소 규모 댐 및 홍수 조절지 건설, 하천 주변 자전거길 조성, 친환경 보(洑) 설치 등을 추진한다는 것이 주 요체이다.
대한하천학회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강에 수중보가 설치돼 수질이 깨끗해졌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보로 인해 물길이 정체되면서 한강 수질이 더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2012년에 들어 4대강 사업이 추진되었던 한강과 낙동강 일대에서 맹독성이 있는 녹조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원인은 '4대강에 보를 설치하여 유속이 느려졌기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집권 5년간 일반회계 국고채 증가는 29.2조원에 불과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일반회계 국고채는 2010년 119.7조원으로 3년간 64.1조원이 늘어났다. 참여정부 시절에 매년 10조원을 넘지 않던 일반회계의 적자 국채 순증규모가 이명박 정부 집권기인 2009년과 2010년 각각 30조원 이상 급증하였다.
2012년 6월 1일 변경된 회계기준으로 국가채무는 774조원으로 집계된다. 발생주의 회계기준으로 적용한 결과로는 중앙정부 국가채무가 지난해 말 403조원에서 774조원으로 무려 371조원이나 증가했고 GDP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32.6%에서 63%로 높아졌다,
국가채무는 774조원이지만 여기에 지방정부 채무 20조원, 공공기관 부채 463조원을 더하면 공공부문 부채는 1257조원으로 1000조 원대를 훌쩍 넘어선다.
대북관계 강공책…G20정상회의 합격점
이명박 정부는 일관되게 남북관계를 어렵게 이끌어갔다. 이명박의 대북정책은 순차적 상호주의와 한미동맹에 우선하는 기형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한미동맹 우선은 북미관계와 미국의 정책에 따라 대북관계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남북관계를 한미동맹에 철두철미 수동화시키고 있다. 또한 순차적 상호주의도 북에서 뭘 하면 답을 하겠다는 것으로 일반적 상호주의보다 훨씬 후퇴한 정책이다.
2010년 11월 11~12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이틀간 정상회의를 거쳐 각국 정상들의 합의를 통해 '서울정상회의 선언문 및 합의문(서울선언)'이 채택되었다. ‘2010 서울선언’ 주요합의 내용 일부는 글로벌 금융안전망 및 개발의제 채택, 급격한 자본유출입 막기 위한 신흥국의 거시전전성 규제 도입 허용 등이다.
G20은 2008년 11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정상급 회의로 격상되었고, 2009년 9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개최된 제3차 회의에서 G20 정상회의를 정기적ㆍ계속적으로 열기로 합의하면서 세계경제문제를 다루는 최상위 포럼으로 격상됐다.
2012년 3월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시작된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27일 40개 나라와 국제기구 수장을 포함한 58명의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서울코뮈니케'를 채택한 가운데, 이틀에 걸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가 막을 내렸다.
2010년 4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핵테러 위협 방지와 핵물질 방호 등을 주제로 첫 회의가 열렸으며 세계 47개국과 유엔, IAEA, EU 등 국제ㆍ지역기구가 참가했다. 주요 핵무기 보유국과 원전 보유국들이 참여하는 이 협의체는 2년마다 1번씩 회의를 개최한다.
이명박은 著書로 '6·3 학생운동사'(1994), '흔들리지 않는 약속'(2007년), '신화는 없다'(1995),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등이 있다. /소정현 프리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