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봄이 봄 같지가 않다. 전쟁 위협에 이어 개성 공단까지 폐쇄 됐으니 어찌 이 봄이 아름답겠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 됐다. 남북관계는 동포애를 바탕으로 풀어야 한다. 가난한 친척에게 좀 퍼주고, 힘 없는 사람에게 져주면 어떤가”

이상화는 일제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그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는 분명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이 시를 썼다. 시 속에 드러난 조국의 강산은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민족혼을 일깨워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지. 시인의 감성과 표현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나라를 빼앗겨 얼어붙은 시절에도 이상화는 이 땅의 봄을 그렇게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노래했다. 한 세기(정확히는 90년)가 지난 오늘 우리가 맞는 조국 강산의 모습은 이상화의 봄 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워야 맞다. 나라도 되찾았고 먹고 사는 데 큰 걱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니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은’ 봄이 아니다. ‘잘 자란 보리밭이 간밤 자정 넘어 내린 비로 삼단 같은 고운 머리털을 감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북측의 전쟁 위협 때문이다. 정부는 “해볼테면 해봐라”며 맞불을 놓고 있다. 두 마리의 맹수가 으르렁 거리며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표정하지만 속마음은 대단히 무겁다. 전쟁으로 생명과 재산을 잃는 수 있는 가능성도 조금은 걱정스럽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노려보는 상대가 동포라는 점이다. 60년 전에 있었던 민족적 비극이 다시 빚어질 위기 상황이니 어찌 이 봄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겠는가.

피를 나눈 동포 간에 총질을 해대는 비극은 한번으로 족하다. 그 상흔을 지우느라 우리는 지난 60년간 피땀 흘리며 고생 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 모습에 전 국민은 감격에 겨운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산가족의 상봉, 김대중과 김일성이 포옹하는 모습에서 화해와 통일의 가능성을 보았다. 금강산 관광길과 개성 공단이 열리는 대목에서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희망을 가져도 좋겠다고 믿었다.

그런데 역사는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의 총탄에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이명박 정권은 사건 발생 다음날 금강산 관광길을 막아버렸다. 박 씨의 사망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꽃샘추위 정도로 보고 싶었다. 결과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돼버렸다.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핵실험에 이어 전쟁 위협으로 수위가 높아지더니 드디어 마지막 희망의 끈이던 개성공단의 폐쇄에까지 이르렀다. 오늘의 불행하고도 위협적인 상황을 민족 앞에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정부는 전적으로 북측을 탓한다. 우리 정부는 과연 아무 잘못도 없는가. 아니다. 남북 화해 정책을 ‘퍼주기’로 비난하면서 남북관계를 민족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으로 몰아간 것도 북측의 도발 빌미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위기 상황의 원인이 무엇이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대 국가, 민족대 민족 간의 사태라면 자존심과 국익을 먼저 따져야 겠지만 남북관계는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된다. 동포애를 바탕에 깔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집안싸움이 나면 나이 많은 아제비가 참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누가 보아도 여건이 더 좋은 우리가 참고 또 참아 김정은 정권의 도발만은 막아야 한다.

가난한 친척에게 좀 퍼주면 어떤가. 힘없는 사람에게 져주면 어떠한가. 달래고 어르는데 핵폭탄 들고 나서겠는가. 이명박 정부가 막아버린 남북의 길을 박근혜 정부가 활짝 열어주길 기대한다. 국민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봄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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