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성지로의 여행
원불교 성지로의 여행
노루목과 대종사
백수읍 길용리를 구호동九虎洞이라고 한다. 이 같은 지명은 구수산에서 뻗어 내린 9개의 지맥이 호랑이 형국이다. 또는 아홉 호랑이가 노루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버티고 있는 형세이다 하기도 하고, 구수산에 살고 있는 호랑이가 이 골짜기로 잘 드나들어서 구호口虎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노루목이라는 곳은 길용리 당산으로 그 뒷산의 생김새가 마치 노루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고 당산이 노루머리에 속하는데 이 당산과 뒷산 사이가 목처럼 가느다랗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인걸은 지령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옥녀봉玉女峰이라는 봉이 있어 양택으로 좋은 터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 옥녀봉은 영촌 마을 뒤에 있는 해발 140m 내외의 작은 산봉우리다. 이 옥녀봉에 오르면 멀리 법성 앞바다가 거울처럼 보여서 예부터 천상의 옥녀가 이 바다를 거울로 삼아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고 했다. 이 옥녀봉은 마치 여자의 낭자처럼 보인다.
원불교 교조 대종사 박중빈朴重彬이 10살이 되던 1900년에 마을에 큰 홍수가 발생해 중빈은 영촌에서 300m 가량 떨어진 구호동 마을로 이사를 갔다. 다음 해 10월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서면 마읍리 북종산(111m)에 있는 선산의 시향제에 참여하였다. 중빈은 선영의 묘에 제사상을 차리기 전에 묘에서 떨어진 곳에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왜 산신제를 먼저 지냅니까?” “산신은 이 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할아버지보다 더 능력 있는 신이므로 그렇단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산에는 능력 있는 산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에 의문을 품고 깊이 따지는 습성이 있던 중빈은 산신이 전지전능하다는 말을 들은 뒤 구호동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집에서 4km쯤 떨어진 삼밭제의 마당바위를 매일 찾아가 전지전능한 산신의 가르침을 받고자 빌었다.
“산신님이여! 나타나시어 제게 가르침을 주소서” 하고 빌기를 5년이나 계속하였지만 산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20세가 되던 해에는 집을 귀영바위로 옮겨 기도를 계속하였고 24세 때에는 노루목으로 옮겼다.
중빈은 마을사람들로부터 “도통道通 한다더니 미쳐버렸다”고 하는 비웃음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곳에 초막을 짓고 2년을 지내다 26세가 되던 1916년 4월28일(음 3월26일) 이른 새벽, 노루목에서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우주와 인생의 큰 진리를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음, 사람은 욕심과 번뇌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러워지지만 본성은 불성이야! 깨끗한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짐승도 되고 부처도 되는 거야……’ ‘나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나 마찬가지구나……’ ‘내 마음이 곧 깨달아서 얻는 나의 마음이 부처 마음과 같으며, 따로 부처가 없다’ 그는 스스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도를 깨치고 “……정신을 개벽하자”고 사람들에게 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옥녀봉 밑에 구문도실九門道室을 지어 수도하면서 마을 밑 와탄강에 간척사업을 벌였다. 동지 9명과 함께 1년 만에 2만 6천여 평의 간척지를 완성하고 1923년에 현재의 원불교 영산출장소가 있는 범현동으로 옮겨 영산원을 지었다. 이듬해에 전북 익산군으로 옮긴 그는 행상과 척식회사 논을 소작하며 포교하다가 1943년 먼 길을 떠났다.
이곳 노루목을 중심으로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의 어린시절과 대각 전후에 얽힌 사실이 널리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박중빈이 노루목과 옥녀봉의 지기를 받은 인물이고, 이곳을 만인이 살 땅으로 만든 전설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불교의 탄생
1916년 4월 26일 대각(大覺)
죽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사건이다. 이 극한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있어 가장 큰 힘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이다. 종교는 그래서 사후 세계의 새로운 삶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현실의 삶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을 수련의 목표로 삼고 있는 종교가 있다. 바로 원불교이다.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와 뿌리를 함께 한다. 하지만, 시주 · 동량 · 불공 같은 전통적 불교 관습을 폐지하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이웃의 교화에 힘쓰는 ‘생활불교’를 지향한다. 사후 세계의 영광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먼저 누리자는 것이다.
이것은 소태산의 깨달음에 맥이 닿아 있다.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고 우주 질서를 표현했다. 25세 때인 1916년 4월 28일의 일이다. ‘큰 깨달음’을 이룬 이 날이 원불교의 개교일이다. 저마다의 삶은 만유이다. 이 만유가 건강하고, 건전해야 한 체성 역시 지고할 수 있다.
박중빈은 1891년 5월 5일 백수읍 길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범상하지 않았다. 신의가 있고 탐구심으로 충만했던 소년 박중빈은 7세 때에 맑은 하늘을 보면서 우주, 자연 현상에 대해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9세에는 인간의 생사와 존재문제로 의문은 확장되었다. 11세 때에 시제에 참여했다가 산신의 권능에 대해 듣고, 산신이라면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마당바위에서 4년동안 산상기도를 하며 산신을 만나고자 하였다. 15세 때 양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가장의 책임감은 그의 사유를 헤집고 있는 의문의 덩어리를 눌러놓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구도행각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20세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구도의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문은 마음 깊이 가라앉았다.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라는 화두 하나만 덩그렇게 남았다. 25세 이르러서는 화두마저도 잊고 모든 것을 떠나 삼매에 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몸은 황무지와 같았고, 정신은 처녀지와 같았다. 몸에서는 온갖 부스럼이 돋고, 머리는 산발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전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대했다. 폐허 상태의 극단에 이른 1916년 4월 26일 이른 아침, 문득 생각이 밝아지면서 모든 의문이 풀리면서 온몸이 상쾌해졌다. 이날이 대각일이다.
그는 큰 깨달음을 말보다는 실천으로 전했다. 이듬해 1917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 저축은행을 설립한다. 근검절약하고 허례허식을 배격했다. 금주와 금연을 함께 실천했다. 그리고 숯사업을 벌여 경제적 기초를 다져갔다. 이것이 1차 수련이다. 다음해인 1918년 3월부터는 방언공사를 하여 버려진 갯벌을 2만6000여 평의 옥답으로 개간하였다. 이것을 2차 시련이라고 부른다. 2차 시련을 함께 한 제자 여덟 명을 이끌고 산상기도에 들어갔다. 1919년 8월 20일 흰종이에 맨손을 대자 혈인이 나타나는 이적을 행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봉래산(전북 부안군 산내면 변산 소재)에 들어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교법을 제정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현재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내걸고 종교 교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가 도와 학을 겸비한 수제자 송규宋圭이다. 여기에서 그는 제자들과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했다. 낮에는 개간사업에 전념하고 저녁에는 교법의 틀을 확고히 다졌다. 이것이 원불교 창립의 4차 시련이다.
1926년에는 민중의 생활의식을 개혁할 방침으로 신정의례준칙을 발표하였다. 1935년에는 보화당이라는 약업사를 개설하고 교역자들에게 운영하게 하였다. 본격적인 산업기관을 개설함으로써 자력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0년에는 완주군 수계리에 대농장을 건설하였다. 과수원과 축산업을 겸한 새로운 형태의 복합 산업을 추진하였다. 이것이 5차 시련작업이었다.
1943년 3월에는 기본경정인 ‘불교정신’을 친감하여 발행했다. 그는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과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을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만대에 전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1943년5월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6월 1일에 열반하였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아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니 구공 역시 구족俱足이라”는 법어를 남겼다.
열반 후 교단의 결의에 따라 그의 법위를 대각여래위로 받들고 유해는 원불교 대종사 성탑에 안치하였다. 일제 말기 불법연구회는 민족단체로 지목을 받아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처하게 되었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구공을 통해, 종교 교단이라는 구족을 성취해 냈다. 소태산의 유시에 따라 제2대 종법사로 송규가 추대 되었다. 송규는 해방이후 교명을 ‘원불교’로 확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