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비埋香碑를 세운 사연

사람들은 경외하는 대상을 높이 떠받들고, 그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을 향해 경배를 올린다. ‘올린다는 말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사람의 삶을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들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신을 경배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술과 향이다. 술과 향 모두 오르다’, ‘받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매향을 향을 살라 하늘로 보내는 대신 땅에 묻는다. 그들이 섬기고자 하는, 혹은 염원하는 신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까닭이다.

영광 법성면 입암리에는 매향비가 하나 서 있다. 매향 의식은 일반적으로 행해진 의식이 아니다. 향나무 혹은 침향을 땅에 묻어 미륵보살을 공양하며 극락왕생을 염원했다.

이런 염원을 다듬지 않는 돌에 기록하여 세운 것이 매향비이다. 매향비를 다듬지 않는 돌로 세운 것은 아직 현신하지 않은 미래불인 미륵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한다.

입암리 입전마을의 매향비는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잘 다듬어진 비석들 사이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마을 앞에 있었던 것이 1973년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면서 파묻히고 말았다. 1985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발견된 것을 방치하였다가 1987년 마을 노인정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비면의 크기는 높이가 120cm정도이고, 가로 폭이 35cm 쯤으로 아래가 굵고 위쪽은 덜 굵은 자연석이다. 글씨는 앞면에 4줄 오른쪽 면에 3줄로 나누어 세로로 60자 이상이 음각되어 있다. 앞면에는 조선 태종 10(1410)에 매향한 사실을 적고 있다. 옆면에는 고려 공민왕 20(1371)에 매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매향을 주도한 이들은 향도라는 것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매향에 대한 기록은 내세를 희구하는 불교의 사상 혹은 비보 사상으로서 풍수와 연관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교에서는 매향의 최적지로 바닷물과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을 들고 있다. 이런 위치까지 정한 것으로 보면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최고의 침향枕向을 얻고자 하는 현실적인 바람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서정주 시인은 침향이라는 시에서 매향의 민중적인 의미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 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점거 넣어 둡니다. 沈香,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도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百年水底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야 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千年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오.

비에는 141010월 남향 200거리에 매향비를 세운다는 내용과 참여한 사람과 시주자의 인명을 적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다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무렵에 제방을 축조하여 현재는 들판이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골목을 빗독거리라 불렀다. 바다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올 때, 매향비는 매향하였다는 사실과 그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의 기능을 상실하고 배를 매는 계선주로 활용되었다고 기억하는 노인들이 많다.

매향비에 새겨진 대로 하면 매향비로부터 북쪽으로 200보의 거리에 침향枕向으로 가는 참나무가 묻혀 있다는 말이다. 2371년이면 꼬박 1천년의 세월이 지난다. 그때 그 침향의 향기는 매향을 했던 이들로부터 그 사이를 살다간 이들을 거쳐 2371년의 사람들까지 꼬박 천년의 시간을 하나로 뭉쳐줄 수 있을까.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사이의 數百 數千年은 이 沈香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전남 최초의 천주교 순교지

조선시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대왕이 1800년 승하했다. 11세밖에 되지 않은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탄압하도록 명을 내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죽은 사람만 해도 300명이 넘었다. 당파싸움이 천주교 탄압을 불러 왔던 것이다. 조선조 최고의 지식인 정약용이 피해를 입은 것도 바로 이 신유박해 때였다. 그의 셋째형 정약종(세례명 아오스딩)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정약용 역시 유배를 당하게 된다.

마침 장날이었다. 영광장날이면 영광 사람들만 아니라 인근 함평, 고창, 장성 등에서 물건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마치 잔치라도 난 듯이 태평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날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겨드랑이에 창을 낀 군졸들이 포승줄에 묶인 두 사람을 질질 끌고 우시장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날라리를 부는 사람과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큰 칼을 어깨에 둘러맨 망나니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앞섰다.

포승줄에 묶인 두 사람의 형색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흰옷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얼마나 땅바닥에 내쳤던지 옷은 황토물을 들인 듯 했으며, 피로 얼룩진 옷이 살과 엉켜서 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산발한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고, 머리조차 무거운 듯 가누지도 못했다. “천주쟁이들이라네.” “오늘 처형한다는 소문이 있더만……” “사람 많이 모인 장터에서 죽이려나 보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소리를 죽여가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누군가가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저거 우리동네 이화백 아닌가?” “사람 좋은 이화백이 천주쟁이로 몰려 오늘 죽나보네.” 다른 한쪽에서는 또 몇몇 사람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 옆에 사람은 복산리 오씨 양반 아닌가?” “그러게. 그렇게 인정 많은 오씨 집안이 대대로 잘 살더니만, 이제 패가망신을 하는구만.” “천주쟁이 몇 사람이 더 붙잡혔다더니만 두 사람만 죽일 셈인가보네.” “나머지 사람들은 귀양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고 그래

군졸들이 장터 한가운데 사람 허리높이로 말뚝 두 개를 박았다. 눈을 가린 두 사람을 말뚝에 꽁꽁 묶었다. 미친듯이 태평소를 불어대자 술에 취한 망나니가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한곳에 모아졌다. 말뚝에 묶인 두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뭐라고 계속해서 읊조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났다. 언제 힘들어 했느냐는 듯이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해하는 느낌마저 들정도로 평화롭고 거룩해보였다.

순식간이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밤처럼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광풍이 몰아쳤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계속되었다. 일순간에 형장을 주시하던 사람들은 세찬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져버렸다. 비가 그쳤을 때는 이미 장터거리에 두 사람의 목이 높은 장대 위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끌려오던 때와 는 달리 표정이 한없이 평화롭고 오히려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전남지역에 있었던 천주교 최초의 순교였다. 가까운 곳에 성당이 세워졌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두 순교자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염산의 기독교 순교지

오늘은 정말 기분이 산뜻하다. 선생님이 내주신 염전에 대한 숙제를 위해 엄마, 아빠와 같이 영광의 염산이라는 곳을 처음 가게 되었다. 아침 내내 엄마는 소고기를 다져 넣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이며 여러 가지 먹거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붉은 해당화가 예쁘게 피어있는 백수해안도로를 타고 차를 몰던 아빠가 이런 제안을 했다.

염전에 가기 전에 우리 염산에 왔으니까 유명한 곳 한 곳을 먼저 들러볼까?” “그게 어딘데요?” “나도 듣기만 했는데 육이오 때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한 곳이래더라. 전국적으로

도 아주 유명한.” “무섭지 않아요?” “교회가 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랜다.”

의견은 금방 모아졌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염산면 봉남리에 있는 염산교회였다. 교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닷가에는 높은 기념탑이 서 있고, 순교공원에는 합장묘와 77인의 기념비, 또 순교자료 전시관도 멋져보였다. 바다의 풍경과 어울리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고, 달력에 실린 외국의 한 풍경사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양쪽으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전시관에 들어섰다. 시골에 이렇게 큰 건물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구경하는 것도 참 신기해보였다. 시골 외가에 가보면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모습만 늘 보아왔기 때문에 더욱 생소하게 느껴졌다. 뒤로 안 일이지만, 우리가 찾은 곳은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진 기독교 순교지로서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밖의 풍경화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에 들떴던 마음이 기념관 안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정말로 처절했던 우리의 역사가 여기 전시되어 있구나.” “여보, 정말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까?” 엄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아빠에게 말하면서 나를 흘낏 보았다. 잘 보아두라는 눈짓처럼 보였다.

말로만 듣던 것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구만.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의 목에 새끼줄로 무거운 돌맹이를 매달아 바다에 던질 생각을 했을까?” “죽는 순간까지도 찬송가를 부르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또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서로 위로했대잖아요, 무섭게 죽어가면서도.”

한 사람의 생명도 위대한 법인데, 더구나 77명이나 되는 목숨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다니……”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차를 타고 다시 염전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 가족은 한동안 말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순교의 아픔과 처절했던 당시의 상황이 차창밖에 파노라마처럼 어리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에 가면 내 발표시간에 꼭 오늘 보았던 것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어야겠다. 전쟁이 얼마나 나뿐 것인지, 그리고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다시 한 번 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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