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굴비와 이자겸李資謙
귀양길은 멀기만 했다. “아직도 멀었느냐?” “네, 이백여 리는 더 가셔야 합니다.” “영광 땅은 멀고 멀기도 하구나.”
이자겸은 한때 왕위를 넘겨다보던 세도가였다. 그는 심복이었던 척준경拓俊京(? ~ 1144)의 배신으로 왕권을 눈앞에 두고 잡혀 영광군 법성포로 귀양을 가고 있었다.
당시 고려는 중기로 접어들면서 중앙의 문벌 귀족들은 기득권 유지, 확장을 위한 주효한 방편으로 혼인관계를 이용했는데 그 중 가장 매력적인 혼인 상대는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되어 왕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던 몇몇 가문은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구가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외척가문인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겸李資謙(? ~ 1126)의 권세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이자겸은 예종이 죽은 후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이자겸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나란히 인종과 결혼시켰다. 인종에게 이자겸의 딸들은 이모였다. 아무리 근친결혼이 성행했던 고려 왕실이지만 이모와의 결혼은 상당히 무리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으로 나이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청년으로 성장한 인종은 이자겸의 방자함이 도를 넘자 아무리 외할아버지이며 장인이더라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인종은 지녹연 · 김찬 · 오탁 등과 모의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인종 측은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 등을 죽이고 기선을 잡는 듯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함으로써 인종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성품이 단순했던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이 살해당하자 분노하여, 왕의 말을 무시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화마를 피해 나오는 인종 측의 인사들은 모두 척준경에 의해 살해당했고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감금되었다.
이자겸을 제거하려던 인종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자 인종은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기겠다고 조서를 내렸다.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자겸은 주변의 반발이 두려워 감히 이를 받지 못하고 반납하였다, 대신 그는 임금을 압박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되었다. 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한 이자겸은 가히 왕과 같은 권세를 누렸다. 또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간에서 떠도는 십팔자득국설을 믿고 스스로 왕이 될것을 언제나 획책하였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란 십팔자十八子 성姓 즉,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도참설이었다. 그는 인종을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떡을 올리기도 하고 독이 든 약사발을 바치기도 하였는데 인종은 이러한 암살의 위기를 이자겸의 4번째 딸이자 자신의 2번째 왕후의 도움으로 번번이 넘길 수 있었다.
이자겸의 핍박 속에서 기회를 노리던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했다. 척준경은 성품이 거칠고 단순하기는 하나 곧은 면이 있었고, 다혈질이지만 왕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은 이런 척준경의 성질을 이용하였다. 앞서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척준경이 궁궐에 방화하고 인종에게까지 화살을 날린 것은 죽을죄라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죄를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척준경의 분노를 들은 이자겸은 화해를 청했지만 척준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노린 인종은 최사전과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 그의 충성심을 기대하고 설득하였다.
이자겸 측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다가 왕에 대한 충성심이 일어난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렸다.
1126년 이자겸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오려 하자 인종은 급히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제거하라는 서신을 보낸다. 왕의 명령을 받든 척준경은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한 뒤 김향 · 이공수와 함께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왔으며, 척추경은 이자겸을 포박하였다. 그러나 왕은 외조부요, 장인인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영광으로 유배를 명하였다. 이자겸의 자식들과 부하들 역시 귀양 보내졌으며 왕비의 자리에 있던 두 딸은 대궐에서 쫓겨났다.
도성에서 쫓겨난 이자겸은 외롭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밥도 거르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먹는둥 마는둥 하던 그는 어느 날, 알이 밴 말린 조기를 맛볼 수 있었다. “허어, 그거 참 맛이 좋다. 거! 알은 더 기가 막히네! 여보시게 이 물고기 이름이 무엇인가?”
“그것도 모르시오! 조구 말린 것이오.” “조구라……” “조기를 여기서는 조구라고 합니다. 나리!” “으흠, 진상되던 조기는 먹어보았지만 이렇게 말린 것은 처음 먹어 보는구나.”
당시 법성포 연안에서 잡히는 조기는 그 맛이 이미 조정에 잘 알려져 조기를 비롯하여 법성포에서 어획된 어물도 일정량을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가장 먼저 잡은 것을 급장給狀하여 역마驛馬로 상납하게 하였으며, 진상進上하기 전에 사처私處에서 먼저 사용하는 경우에는 전주箭主 · 선주船主 · 소재관을 중한 형벌로 다스렸다.
“이 조기를 어떻게 가공하는가?” “생조기를 저 뒷마을 용성염소에서 구운 소금에 절여 토굴土窟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 놓은 후 하루 뒤에 꺼내서 말리지요.”
“아! 놀랍네, 염장을 하고 햇볕과 바람에 말린다! 아주 훌륭한 방법일세. 조구 말린 것이라 하지 말고 내가 이름을 짓겠네.”
‘조기 머릿속에 흰 돌 같은 이석茸石 두 개가 들어 있으니 석수어石首魚라 할까,……
소금으로 절여 토굴土窟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 놓은 후 하루 뒤에 꺼내서 말린다……’
여보게! 그냥 석어石魚라고 하게. 몇일 후,
여보게! 바람에 말린 조기는 굴비掘非라 명명하고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하게!
이자겸이 인종에게 바친 굴비, 법성포산 건조 참조기는 굴비라고 명명되었다
영광으로 유배된 이자겸은 영광 칠산바다 바람에 건조한 참조기 맛에 반해 이를 인종에게 진상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건조 참조기를 굴비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굴비이다. 이자겸이 이 건조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비록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굴복하거나 비굴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고 전한다.
이자겸은 유배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인종은 이자겸이 죽은 뒤 이자겸의 아내, 즉 자신의 외할머니 최씨를 다시 불러들였으며, 이자겸을 검교 태사 한양공으로 추증하였다. 두 왕후도 비록 자리에서는 쫓아냈지만 죽을 때까지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후 영광굴비는 일약 유명해졌으며, 고려조정에서는 굴비를 중국 원나라에 진상했고 조선시대에도 명나라, 청나라에 매년 굴비를 보냈다고 한다.
불타는 물, 법성토정의 내력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조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고깃배에서는 물보다 술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일렁이는 바다에서 죽음과 맞서면서 조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들로서는 술이 없으면 고된 노동을 이겨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만큼 많은 양의 술을 배에 싣고 바다에 나갈 수는 없어 항상 어부들은 불만이 많았다.
고려시대 때의 일이었다. 칠산 앞바다에 조기를 잡으러 나갔던 배가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요행이 바다 위에 떠다니던 큰 널판지를 잡고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은 배를 보자마자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배에 올라탄 사람은 바로 기절을 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자 깨어났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뒤로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몽고군이었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배를 타고 도망을 치자 그 뒤를 쫓는 관군의 배에 몽고군들이 옮겨 탔는데 심한 풍랑에 배 한 척이 난파를 당했던 것이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말도 통하지 않으니 어찌하는 수 없이 그 사람은 법성포에 눌러 살게 되었다. 이윽고 기력이 회복되자 고깃배를 타고 바닷일을 하러 나갔다. 말을 타고 다니던 사람이 배를 타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일도 일이지
만, 죽을 듯이 멀미를 하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뱃사람들이 나눠마시던 막걸리를 마셨더니 조금은 더 나았다. 그러나 술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다른 뱃사람들도 힘들어했지만, 이 몽고사람은 몇 배나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만선을 해서 법성포에 돌아온 뒤, 이 몽고사람을 손짓발짓을 하면서 열심히 선주에게 뭔가를 주문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손짓발짓을 하다가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직접 시늉을 하기도 하고,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기도 했다. 선주집에서는 그가 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며칠간 여러 가지 준비를 하던 몽고사람은 마침내 마당에 화덕을 걸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화덕 위에는 법성포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이상한 모양의 그릇이 얹혀 있었다. 화덕에 불을 한참 지피자 이상한 모양의 그릇에서 방울방울 투명한 물이 받쳐 놓은 바가지에 떨어졌다.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선주의 코에 이상야릇하면서도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고도 황홀하게 하는 냄새가 느껴졌다. 그 냄새는 담을 넘어 마을로 퍼져갔다. 처음 맡는 냄새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한사람 두사람씩 무슨 냄새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선주집으로 모여들었다. 마당에는 벌써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바가지에 투명한 물이 반쯤 찼을 때, 몽고사람은 작은 조롱바가지에 그 물을 채워 선주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마시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선주는 의심이 가고 해서 조금만 혀를 대어보았다. 순간 혀가 불에 데인 듯이 뜨거웠다. 마치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물을 마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한번 입에 댄 그 맑은 물은 이 지상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황홀한 느낌을 주었다. 다시 한 모금을 마시자 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선주는 조롱박에 남은 물을 마당에 모인 마을사람들에게 한 모금씩 마셔보도록 했다. 처음 맛보는 불타는 물에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금방 기분이
좋아지면서 힘이 불끈불끈 솟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법성토정이라는 소주는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법성토정을 만드는 방법이 마을에 퍼졌다.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면서도 많은 양의 막걸리를 싣지 않아도 되었다.
막걸리보다도 열배 이상 독한 토정을 싣고 가면 바다에서 고된 뱃일을 하면서도 힘든 일을 잊을 수 있고, 또 막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에 겯들이는 그 맛 또한 일품이어서 지금까지도 법성토정은 지역 특산품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전해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