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영광신문 편집위원
사람은 누구나 지극히 고요한 시간을 느낄 때 부귀영화에 상관없이 지극한 마음의 눈을 뜨게 되며, 그 마음의 눈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고독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삶의 열정으로 인해 나를 잊고 살아온 시간들, 천사만려(千思萬慮:천가지 생각과 만가지 걱정)에 시달리면서도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지난 날들이 돌아보면 참 가치있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해도 마음 한 구석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수 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감을 어떻게 느껴야 할까? 확신이 서질 않는다.
가을 밤, 어쩌다 혼자 있게 된 그 시간에 느끼는 고독. 그래서 옛사람들은 추성불능문(秋聲不能聞:가을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이라며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기도 했나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천진난만한 유년의 시절을 보내고, 먼 미래를 내다보며 청운의 푸른 꿈을 키우던 소년기를 지나서 내 개인의 삶보다는 공공의 목적에 부합되는 사회적 정의감이 우선시 되는 청년기를 보낸다. 그러고 나서 결혼이라는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2세들을 낳고 기르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로서, 또는 한 집안의 며느리나 사위로서 자리매김되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회적 영역에서 가정적 영역으로 위치가 전환되고 제한 됨은 물론 축소된 삶을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나”라는 주체적 삶보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중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이는 지구상에서 유성생식을 하며 생을 유지해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본능에 의한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수컷들은 산란 직후 먹이활동을 위해 바다로 간 암컷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알의 부화를 위해 수개월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얼음장 위에서 아사 직전까지 목숨 걸고 그 알을 지켜낸다. 이 또한 본능에의한 생명활동이 아니고 단순한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간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자신보다는 가족이라는 소규모 공동체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 나를 잊고 살다보니 어느덧 50대! 그렇게 살아 온 어느 가을 밤, 지나온 세월을 조용히 돌이켜보니 흘러간 것은 세월만이 아니라 그새 자식들도 성장을 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 너머로 벗어나고, 사랑으로 만나 정신없이 함께 달려온 아내도, 남편도 조금은 낮선 이방인처럼 느껴지며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가을 밤처럼 허전해진다.
깊어가는 가을 밤, 잠못드는 처마 밑에 꺾어지는 밤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니 위(胃)에서 신물이 솟구쳐서올라 정수리를 찌른다. 가슴이 쓰리고 아려온다. 추성불능문이 과장이나 엄살이 안닌가보다.
삶이란 이토록 허무하고 쓸쓸한 것이었던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음 또한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 감이 그와 같구나.
구도자처럼 경구를 되뇌어보지만 도무지 마음이 채워지질 않는다. 이 허전한 가을밤의 시름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겨운 마음 견딜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만 융단에 박힌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던 별들조차 짙은 시름만을 더해준다. 혼자서 먼 길 가는 새벽달이 더욱 쓸쓸하기만 하다. 문득 구체화되지 않은 누군가가, 그 무엇인가가 그리워진다. 그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한참동안 몸살을 앓다 보니 그 것은 바로 정(情)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정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들이 내 육신과 마음 모두로 연결지어진 바로 그 정이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그래,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사랑의 마음도 미움의 감정도 그 부질없던 욕망도 모두가 정이었구나!
성리학에서는 심즉정(心則情)이라 했다. 마음이 곧 정이라.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심과 정은 같은 것이면서도 다르다. 심(心)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면 정(情모)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이 그러하듯이 남극의 펭귄들은 본능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신이 있다면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한 완벽한 존재로 상징되기에 또한 정을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 정을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조물주의 실패작이면서 걸작이다. 인간이 정을 느끼지 못하고 관념과 추상에 갇힌 심(心)만이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무미하고 건조할까? 그래서 “천추일심만리일정(千秋一心萬里一情:천년 세월 오직 한마음이며 만리밖에서 느끼는 그 정도 오직하나)”이라 했던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정(情)밖에 없다”라고 했던가?
그래, 정이 있으니 사람이지, 아니지 정이 있어야 사람이지..... 그렇게 정이 그리운 가을이 깊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