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천/ 자유기고가
지금 우리나라의 지상파와 종편이 이끌고 있는 90% 이상의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담론들은 꼭 코페루니쿠스 지동설 이전 천동설 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종북몰이가 대표적이다. 대중들의 뇌리에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입력하고, 체제 불안을 내세우면서 세운 가설들로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으니 식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텔레비전을 욕하면서 보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어디 방송 뿐인가? 얼마 전엔 중앙일보에 간첩신고 건수가 급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국정원이 111 전화신고와 홈페이지를 통해 받은 간첩신고는 4만7000여 건.지난해 4만여 건이 접수된 것을 볼 때 크게 늘어난 수치다." 이렇듯 간첩신고가 4만여건이라고 기사를 썼으면 실제로 확인되거나 적발된 간첩은 몇 명인지 알려줘야 하는데 기사 내용에는 그런 게 없다. 다만 밑에 공안사범 검거실적이 나온다. "공안사범 검거 실적은 김영삼 정부 때 149명이던 것이 김대중 정부 112명, 노무현 정부 50명으로 줄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다시 194명으로 늘었다."
왜 간첩 통계에서 공안사범 통계로 초점을 바꾼 것일까? 박근혜 정부에서 검거된 간첩은 4명, 모두 탈북자 위장간첩이다.
중앙일보는, 2013년 간첩신고 건수 4만7천명에서 간첩검거 4명으로 옮겨 가기가 부담스러웠나보다. 그것보다는 숫자가 큰 공안사범 검거로 얼버무렸다.
민주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기본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연구도 필요한 것인데 좌파·사회주의·마르크스라는 글자만 들어가도 좌빨, 종북으로 오해받고 준간첩처럼 인식되는 쪽으로 우리 사회가 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북한에 대한 경각심을 지켜나가는 건 문제될 게 아니다. 하지만 반공이념과 방어기재가 국민 감시장치로 작동하는 게 문제이다. 간첩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도 ‘나도 언젠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신고 당하면 끌려가 조사받게 될 수 있지’라는 생각에 오해받을 행동을 지극히 자제하며 살아간다. 수십 년을 반공구호, 간첩신고 구호와 함께 살아 온 세대는 더욱 그렇다.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자기검열이 몸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배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 등도 함께 감시당하고 검열 받고 자기검열에 의해 수그러든다. 그런 두려움을 뚫고 거리로 나서서 시위를 하거나 노동운동을 벌이면 그것은 국가 혼란 야기, 불순책동, 북한에 동조, 국가안보 불안조성 행위와 동일시되면서 반국가 공안사건으로 공권력의 탄압을 받는다.
과거에는 권위주의 정권과 공안당국이 강제로 주입하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극우적 보수단체나 수구보수언론이 집단적 최면에 나서고 정부가 이를 두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퇴행을 겪고 있다. 모든 형태의 비판과 저항, 기득권 체제에 대한 개혁 요구와 도전, 진보적 이념과 시도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이것은 가히 파시즘과 메카시즘의 광풍이라 부를 만하다.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군부대가 개입하고, 관련 수사마저 파행을 겪으며 검찰·경찰이 수모를 겪어도 우리 사회가 이리 편안하다. 그러면서 '간첩통계'도 아닌 '간첩신고 통계'를 슬그머니 흘리며 국민 여론을 잠재우려 하는 작태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해방 뒤 이 땅에서 종북으로, 간첩으로, 긴급조치로 학살하거나 사형시키거나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얻어냈던 사건들이 몇년 전부터 계속 무죄로 판명되고 있다. 보도연맹 사건, 인혁당 사건, 여주 양민학살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진보당 조봉암, 와이에이치(YH) 사건,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 줄줄이 무죄로 판결이 나고 거액의 국가배상금을 내라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폐기되어야 할 부끄러운 것들이 은밀하고 거대하게 부활하고 있는 우리 정치․사회의 시계바늘은 한참을 거꾸로 돌고 있다. 아! 이제 그만, 막가파식 종북몰이를 집어치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