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노선생님 지금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을 들여다보고 계십니까? 지금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참으로 현묘(玄妙)하고 현묘하신 선생님께서 대답을 해주시지요. 무위(無爲)의 현묘(玄妙)함과 황홀(恍惚)함이 또 한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에서 커다란 궁금증으로 다가옵니다. 본질이 없는 세월의 흐름을 따지는 일, 본질 자체를 규정하는 일 또한 어리석은 짓이란걸 알면서도 세상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도 아직 무위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하고자 했던, 당신을 닮은 몇사람을 떠올리며 한 순간이라도 그 현묘함 속에 취해보고자 노력합니다.
노선생님! 르네상스시대 피렌체의 미친놈 카라바 죠(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를 아시는지요? 만약에 선생께서 카라바죠를 만났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 예술은 그렇게 하는거야, 바다가 모든 물의 제왕이 될 수 있는 건 자신을 한없이 낮은 곳에 두기 때문이지 그러나 자네도 물처럼 유약하면서도 자연스런 흐름의 자연스러움(上善若水)을 좀 더 공부하시게..허허허”
그래도 노선생님, 카라바죠가 얼마나 기특하고 대단한가요? 보십시오 그가 그린 <성베드로의 순교>와 <성 바울의 개종>이란 그림을!
그 위대한 성인들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까요?, 순교하기 전의 베드로는 어찌하여 성인답지 않게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으며, 예수의 사도인 바울은 어찌하여 그리도 처참하게 그리고 불쌍한 모습으로 땅에 내동댕이쳐져 있을까요?
이쯤 되면 그 전까지만 해도 절대적으로 작용했던 신(神)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당신이 말한 이념과 이상, 관념, 통일, 집중, 일체성을 위한 도덕적, 윤리적 아우름, 관념이나 이론체계로 규정되어진 선(善)의 또다른 폭력을 부정하고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멀리 있는 저곳이 아닌 나와 관계되는 이곳을 중시했던 당신을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정녀 마라아의 죽음>에서 감히 마리아의 모습을 물에 빠져 죽의 창녀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한 예수의 상처에 의심 많은 도마가 손가락을 넣어볼 때 그 고통스런 아픔의 표정을 짖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며, 발가락 사이에 때가 낀 노부부의 모습, 맨발의 성모 등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고자했던 카라바죠, 그가 더욱 당신을 닮은 것은 길거리의 걸인이나 선술집의 주정뱅이를 자신의 참스승이라 했듯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했다는 점이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서는 목잘린 골리았을 자신의 늙은 모습으로, 목을 자른 다윗을 자신의 소년시절모습으로 그려서 한없는 후회와 인생의 연민을 표정에 담아냄으로써 당신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노선생님 그 외에도 당신을 닮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작품 <피에타>에서 어쩌면 그리도 성모의 모습을 슬픈 인간의 감정으로 잘 표현했는지요.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비록 무위의 일부분에도 못미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의 말처럼 위쪽에 군림하지 않고, 권력을 잡고도 취(就)하지 않고 내어줌과 버림의 실천적 삶을 통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까지 회자되는 체 게바라라는 사람도 있었지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당신 이후로 일부분이나마 당신의 무위를 닮으려고, 또 그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참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왜 세상은 아직도 이모양인지요?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을,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을, 버림보다는 취함을,, 세상은 왜 그럴까요? 엊그제는 저를 아는 사람이 아무런 힘도 없는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자기가 가진 것을 누가 뺏으려 하니 도와달라”는 겁니다. 그 욕망 앞에 내가 당신의 무위를 이야기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 반응 할까요?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것은 현대의 가치기준으로 설정된 물질(경제력) 위에 당신의 무위를 도입하려는, 그래서 진정한 무위자연의 세계를 구축하려는-약간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움직임들이 아이러니칼하게도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해오던 사람들한테서 먼저 활용되려 하고 있으니 한 번 기대해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 함석헌이라는 훌륭한 분이 계셨어요. 그 분은 우리 나라가 아주 암울했던 시절 여러 가지 운동을 주도해오셨던 분인데 그 분이 두고두고 되새겨보아야 할 한 말씀을 하셨어요. “근대사에 수많은 혁명가들이 있었는데 왜 혁명은 완수되지 않고 있는가? 그 것은 자신을 혁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하다.” 이 것 또한 어떤 이념의 틀에 갇힌 것이기 때문에 도(道)가 될 수 없다면 할 말 없네요.
그래도 한가지만은 기대해보시지요. 어젯밤 쌓인 눈들이 오늘 아침 햇빛에 녹아내려 수많은 골짜기에서 생명을 키우고 바다로 바다로 한없이 흘러가고 있음에 무위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