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2014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내 유년의 먼-기억 속, 소달구지가 길게 그어간 염전길 따라서 새봄이 오고 있네요. 가을바람 거느리고 세월을 가던 백발의 나그네(갈대)들도 이제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구요.
유언을 남기며 내리던 첫눈의 흔적도 바다로 흘러가고 없습니다. 겨울 추위에 갇혀있던 숭어들도 그 움추림을 털어버리고 부드러운 갯벌에 입맛춤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성급한 계절은 벌써 마파람 눈구멍 찔러놓고 하늬바람을 재촉하고 있네요.
봄이 오는 이 계절의 길목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당신은 지금 무순 꿈을 꾸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느 거리를 걷고 있습니까? 당신의 별은 지금 어느 하늘에서 빛나고 있습니까?
........
지금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 곳이 겨울 눈 속에 갇힌 회색 빛 우울과 고독 속이거나 햇살 한 줌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일지라도, 꽁꽁 얼어붙은 경제 한파(寒波)의 고통 속이거나 싸늘한 세풍(世風)에 식어가는 마음속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영혼이 저당 잡힌 곳이거나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늪일지라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아픔 속이거나 살아도 의미가 없는 나락(奈落) 속일지라도, 지금 당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당신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당신의 존재로부터 의미가 부여되는 세상의 모든 것들.....
당신의 절망도, 희망도,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기쁨도,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싸움도, 원망도, 저주도, 심지어는 부덕(不德)한 행위나 범죄까지도 포함한 그 무엇도...
당신이 존재하는 한 아직은 당신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절대 명제(命題)와 더불어 다시 당신은 진정한 당신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동백은 피어나듯이, 정점에서 스러지는 촛불이듯이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 당신이 되찾을 수 있는 모든 것, 당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 당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 당신이 빼앗긴 모든 것, 당신이 빼앗은 모든 것, 당신이 짓밟힌 모든 것, 당신이 짓밟은 모든 것, 당신이 소망하는 모든 것,당신이 주고자 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이 아직은 당신의 존재와 더불어 당신 안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구석진 모퉁이이거나,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거나, 가장 낮은 곳이거나 당신이 존재하는 동안 당신에게는 천상(天上)의 우아함과 세속(世俗)의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실존(實存)과 더불어 모든 것이 공존합니다.
당신의 미움은 사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당신의 원망 속에는 용서가 깃들어있습니다. 당신의 질투 속에는 배려가 싹트고 있습니다. 당신의 욕망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의 싸움 끝에는 화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과오 속에는 깨달음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당신의 절망 속에는 새 희망이 자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약함 속에는 아직 강인한 의지가 잠자고 있습니다. 당신의 무능함 속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광 속에는 허무함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용맹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당신의 명성에는 늘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당신의 열정에는 회의(懷疑)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부귀는 사실 텅 빈 헛간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항구를 떠나는 배는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항구로 오는 배에는 또 무엇이 실려 있습니까? 당신이 존재함으로 이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은 당신의 항구는 언제쯤 등대가 켜지겠습니까? 언제쯤 등대불이 꺼지고 고단한 항해의 닻을 내린 당신의 배가 고요히 정박할 수 있습니까?
병든 사람도, 범죄자도,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몸을 내어주는 저녁바다에 노을 물들어 가듯 당신의 실존으로부터 또 한 해가 저물었다면 새벽 안개 너머로 아침 해가 찬란하듯이
당신의 실존으로부터 다시 또 한 해의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의 끝에서는 알 듯 모를 듯 한 선문답(禪門答) 같은 당신의 봄이 또 그렇게 찾아올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