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잘하는 아이는 튀면서도 지지를 받는다
진정한 창조성은 공동체성으로부터 나온다
튀면서도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들이 간혹 있다. 대개 창조성과 공동체성을 서로상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그렇다.
사실 창조성과 공동체성이 서로 보완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선뜻인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현실에선 창조성이 뛰어난 아이일수록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오준혁(가명) 군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던 아이였다. 보는 것마다 기해하며 질문을 하는 통에 준혁이 부모는 늘 진땀을 뺐다. 그래도 아이의 호기심을 창의력의 천이라 생각하고 힘닿는 대로열심히 대답도 해주고, 때로는 아이와 함께 답을 찾아가며 아이가 기
심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문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학교라는 공간은 준혁이가 호기심을 마음껏 키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사는 준혁이가 수업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을 계속 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준혁이의 질문을 받아주지 않거나 혼을 내기 시작했고, 반 친구들도 준혁이를 불편해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은 준혁이가 산만해 수업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부모에게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1 검사를부모도 걱정스러워 검사를 받았는
데, 놀랍게도 결과는 정상이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호기심이 왕성할뿐,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소견이 나오자 준혁이 부모는 화가 나 견딜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준혁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보냈다.
캐나다 유학은 성공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던 준혁이가 캐나다에서는 창조성이 뛰어난 아이로 인정을 받으면서 준혁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신나게 학교생활을 했다. 현재 준혁이는 캐나다에서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토론토대학에서 방송 PD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준혁이와 비슷한 사례는 무척 많다. 준혁이의 사례를 보면 창조성과 공동체성이 성격적으로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못하는 우리 교육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요즘에는 우리 교육도 창조성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창조성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준혁이 같은 사례는 대폭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진정 창의적인 아이는 공동체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다. 토론을 성공적으로 수업에 적용한 교사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창조성과 공동체성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나는 경기도교육청, 서울특별시 교육청, 강원도교육청 등의 위탁을 받아수많은 교사들을 대상으로 원탁토론 전문 과정을 운영한 바 있다. 전문과정을 수료한 교사들은 각자 실현 가능한 토론수업을 시도했는데, 모두 토론수업이 창조성과 공동체성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토론수업 중에서도 창조성과 공동체성을 함께 키워줄 수 있는 방식중 하나가 ‘모둠 토론학습’이다. 모둠 토론학습은 5~6명이 한 모둠이 되어 함께 주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토론학습이다. 모둠 토론학습은 어느 한 사람만 잘해서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기 힘들다. 서로 힘을 합해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에 모둠 토론학습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공동체성을 키울 수 있다.
이처럼 모둠 토론학습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아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실제로 모둠 토론학습을 시도한 후 예기치 못했던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난감해했던 교사들도 있다.
고등학교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교사의 경험담이다. 모둠을 구성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 교사는 공부 잘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섞어 모둠을 구성하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을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더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고,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자극도 받고, 함께 공부하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처럼 진행되는 참여식 수업에 활기를 띄었고,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일부 공부 잘하는 학생 몇몇이 불만을 표시했다.
“선생님. 모둠 토론수업 계속 해야 하나요? 제 공부하기도 바쁜데, 꼭 다른 친구들까지 가르쳐야 해요? 혼자 공부할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 속상해요.”
모둠 토론학습을 통해 아이들의 창조성과 공동체성이 조화롭게 성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교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며, 앞으로 계속 모둠 토론학습을 해야 하는지 고민스럽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제대로 튀는 아이들은 공동체성의 중요성을 안다. 공동체성의 발전이 곧 자신의 창조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밑거름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정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다른 친구가 모르는 것을 물어올때 기꺼이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 애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더 확실하게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터득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튀는 아이들만이 공동체 속에서 튀는 것이 진짜 튀는 것임을 모른다. 그런 아이들도 지속적으로 토론을 하다 보면 결코 창조성과 공동체성이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창조성과 공동체성은 다른말로 수월성과 협동성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수월성은 협동성 교육에서 길러진다. 결국 아이들에게 협동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면 곧 개인의 수월성도 키워줄 수 있다. 이것이 곧 튀면서도 지지를 받는 아이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다. 진정한 수월성은 협동을 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화이부동’을 알면 튀면서도 지지를 받는다
“넌 대체 왜 그러니? 형은 너만 할 때, 얼마나 의젓했는데, 넌 어쩜이렇게 부산스럽니?”
“네 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다 뗐어. 그런데 넌 어쩜공부에 그렇게 관심이 없니?”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비교하면 안 된다. 그런데 비교가 아이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부모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을 비교하곤 한다. 아이들을 자꾸 비교하는 것은 아이 각각의 다름과 개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애에 비해 작은아이가 부산스럽더라도 큰애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간단한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걸 못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토론을 하기 어렵다. 나는 토론 교육을 진행할 때마다 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화이부동처럼 토론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토론의 정신을 잘 표현한 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화이부동은 ‘논어(論語)’의 자로(子路) 편에 나온 말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요,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풀이하면 ‘군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토론은 기본적으로 다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모두가 생각이 같다면 굳이 토론할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흥부와 놀부’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놀부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동생이 배가 고파 밥 좀 달라고 해도 안주는 걸 보면서 정말 놀부가 싫어졌어. 흥부가 불쌍해.”
한 아이가 이렇게 놀부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다른 아이들도 생각이 똑같다면 맞장구를 치거나 놀부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물론 토론을 처음 공부할 때는 비슷한 생각이라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토론은 뭔가
심심하고 맥이 빠진다. 좀 더 토론다운 토론을 하려면 다른 생각이 나와 주어야 한다.
“음. 난 놀부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흥부가 불쌍하지도 않아.”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흥부는 능력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애들을 많이 낳았는지 몰라. 낳아만 놓고 밥도 못 먹이고, 옷도 제대로 못 입히는 게 좀 무책임한 것 같아.”
다른 생각이 나와 줌으로써 모두가 놀부는 나쁜 형, 흥부는 불쌍한 동생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토론이 한결 활기를 띄게 된다. 그렇지만 다름만 있어도 안 된다.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이끌어내려는 마음이 없다면 싸움만하며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할 공산이 크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하는 것, 즉 화이부동이 곧 토론의 정신이다. 화이부동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로 ‘구동존이(求同存異)’도 있다. 구동존이는 말 그대로 ‘같음을 구하되 다름이 있다’는 의미다.
중국 고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중국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존’을 ‘있을 존(存)’이 아닌 ‘존중할 존(尊)’을 써 구동존이(求同尊異)이라고 쓴다. 다름의 중요성을 더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우선 다름이 눈에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내 생각과 무엇이 다른지 정확하게 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큰 차이는 물론 미세한 차이까지도 놓치지 않는 간파력을 갖춰야 한다.
다름을 간파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꼭 토론을 할 때가 아니더라도 남들과 생각이 다르다면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생각이 달라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특히 모두가 “예”라고 말하는 상황이거나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평직원 중 부장이나 팀장이 어떤 사안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전 부장님과 생각이 다른데요.”라며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튀고 싶어 하는 마음과 혼자만 튀어서 왕따를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다름을 숨겨서라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마음, 그것이 보통 아이들의 평범한 심리다.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는 역할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몫이다.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이의 생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일수록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이가 어릴 때는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본능적으로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아예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의 다른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다르다고 말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거친 반항으로 생각이 다름을 표현하기도 한다.
아이가 용기 있게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려면 다른 생각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간식을 먹일 때도 일방적으로 “우리 사과 먹자”라고 말하는 대신 “사과 먹을까? 아니면 배먹을까? 우리 예쁜이는 어떤 과일이 더 좋아?”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좋다. 지시가 아닌 아이 생각을 끌어내는 질문에 답하면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각이 다를 때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름은 틀림이 아니기에 부드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다름과 틀림을 혼동한다. 나와 같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매도하고 적으로 취급한다. 토론은 다른 바탕에서 같음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론을 자주 하다보면 다름을 인정하는 데 익숙해질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유연하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그리어렵지 않게 다름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어른들의 색안경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아이들이 다양한 다름을 인정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이 먼저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인정하고 노력한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화이부동을 익히고 실천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