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기/ 난원영광노인복지센터장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국어사전에 나온의리의 정의다.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를 달군 최고의 키워드는 단연의리였다. 실생활에서 널리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던의리라는 말이 최근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가히 신드롬이다.의리를 주제로 하는 패러디가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쏟아진다. 1990년대 중반에 개봉된 영화 투캅스2’ 이후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 진 배우 김보성. 어쩌다 한 번 방송에 나올 때면 예의 선글라스에 검은색 가죽잠바 차림으로 오버를 하면서의리를 연발했던 그가, 요사이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인생사 새옹지마다.

동서고금에의리처럼 좋은 뜻이 담긴 말이 어디 또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까지의리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이나 조직원을 위해서라면 맹목적으로 올인하는 시정잡배의 행위를 때론의리로 혼동했기 때문이다.의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미지에 흠을 준 조폭영화가 밉겠지만 최근에 이르러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듯하다.

시각장애 6급이자, 긴 공백기를 거치면서 그조차 살기가 힘들었음에도의리를 앞세우며 남모를 선행을 펼쳐온 배우 김보성’. 일찌감치 자신의 컨셉트를의리로 잡고 오랫동안 노력해온 그가 때 아닌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다수의 CF를 찍고, 여러 예능방송에도 출연하면서 수입도 크게 늘어 이젠 빚도 많이 갚았다니 함께 축하해줄만한 일이 분명하다.

의리열풍을 일으킨 그는 한 방송에서 "공익에 대한 의리, 타인을 생각하는 나눔의 의리로 화합과 의리의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의리를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이의리를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나 인간관계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정의로 확산시키려는 개념발언으로 느껴져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도 필자의 마음은 왜 이리 씁쓸한 걸까? 사람들이의리에 열광하는 걸 의당 기뻐해야 되는데도 말이다.

의리는 사람이 지켜야할 마땅한 도리이자,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목이다. 잠깐 우리의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고통을 받는 어두운 뉴스가 언론매체를 채우고 있다. 동시에 거짓말 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먼 타락한 사람들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발하는 기사 또한 넘쳐난다. 의리열풍이 불고 있다는 한국사회에서 전혀 의리스럽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의리의 본질상의 기초는 책임감과 사명감이다. 문제는 건강한 사회라면 당연히 담보되어야할 책임감과 사명감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세월호참사를 보면서 국민들은 우리 사회의 의리도 함께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맹골수도에 도착한 해양경찰은 천하보다 귀한 어린학생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머뭇머뭇하느라 골든타임을 놓쳤다.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302명의 소중한 목숨들이 수장되었다. 만약 그 배안에 그들의 자식들이 있었어도 그리 했을까? 자신들의 임무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도 과연 그랬을까?

국민들이 불쌍하기 짝인 없는 건, 사회 구석구석과 국가시스템이 이미 엉망진창인 마당에 해경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무능하고 경직된 관료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 그러다보니 관피아, 철피아, 해피아가 판을 치는 나라.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서로의 머리를 맞대기 보다는 검경을 앞세워 죽은 유병언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헛발질까지 했던 나라. 지켜보는 국민들이 민망할 정도다.

국가와 사회의 근간이 되는 책임과 사명감의 총체인의리가 없으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다. 의리 없는 사회. 의리 없는 국가. 그 속에서 사는 죄로 국민들은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일상처럼 겪게 된다. 김해에선 성매매를 강요당한 가출 여고생이 끔찍한 가혹행위에 시달린 끝에 살해되었고, 시체마저 불에 태워진 뒤 반죽된 시멘트로 뿌려지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자식이 죽기 전 아버지는 동동 구르며 가출신고를 했지만 부실수사로 도마에 오른 경찰의 의지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랐다. 군대는 한술 더 떴다. 집단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관심병사 임병장이 총기를 난사해 꽃다운 생명이 다섯이나 숨졌다. 그뿐이 아니다. 가혹행위로 군 생활을 짐승처럼 해야 했던 윤일병은 맞아 죽어 시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여름 무더위를 한방에 날릴 공포영화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

국가를 지탱하는 강력한 기반인 경찰이나 검찰, 군대를 믿을 수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고, 여론이 들끓어야 겨우 조금 반응하는 국가. 국민은 누굴 믿어야 하나. 의리가 바로 서야 한다. 의리 없는 사람, 의리 없는 국가에게 묻는다. 무릇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는 지키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열매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의리 없는 사람은 사귀지 말라!” 오늘, 명심보감의 가르침이 내 종아리를 아프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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