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거울 속에 비친 가을아침 풍경-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다. 그런데 거울 속엔 내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보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많은 갈대들은 수많은 군상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몸짓을 하고 있다. 그 속에는 아직도 맹골수도 거친 소용돌이 속에 곤두박질쳐져 있는 세월호가 보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원고 학생들의 해맑은 모습과 우울한 모습이 교차해 보이고, 국정감사장에서 무순 질문을 하는지 조차 모르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국회의원 모습도 보이고, “나는 적십자회원도 아닌데 왜 매년 마을마다 할당량을 배정해주고 이장을 통해서 회비를 거의 반 강제로 걷어 가는지? 그리고 그 회비가 쓰인 내력에 대해서는 어째서 아직 한 번도 보고해주지 않는지?”에 대해 따지는 시골 아저씨의 항의하는 모습도 보이고, 갈팡질팡 하는 이 나라 지도자들의 리더십 부재로 인한 아포리아(aporia:진퇴양난)의 대한민국이 보이고…….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앞이 침침해지고 거울 속 풍경은 이내 짙은 안개에 휩싸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약간은 서늘한 가을 아침 바람 한줄기가 불어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거울 속엔 다시 거대한 갈대밭이 펼쳐진다. 때마침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반사되는 풍경은 온통 은백의 물결로 화사하게 넘실대는 갈대꽃 천지다. 가을바람에 취한 갈대숲은 저절로 신명이 나서 지상 최대의 오케스트라가 되고 드디에 베토벤의 합창을 노래한다. 그 갈대밭 위에선 사뿐사뿐 가벼운 몸놀림으로 하늘을 날아오르듯 춤을 추는 이사도라 던컨도 보인다. 멈춘 듯 움직이고 움직이는 듯 멈춰선 임이조의 한량무도 보인다.
그 장면 위로 다시 오버랩 되는 풍경은 이제 영광 예술의 전당 대극장이다.
여러 오페라의 아리아 중 대체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곡들만을 골라서 “오페라 파티”를 열어준 국립오페라단의 공연 현장이다. 서울콘서트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피가로의 결혼> 중“ 서곡” 연주를 필두로 해서 “경복궁타령” 등 우리 민요 몇 곡이 불려지고, 루제오 레온카발로의 “아침의 노래”, 콘수엘로벨라스케스의 “베사메무초”, 요한 스트라우스의 <박쥐>중 “친애하는 나의 후작님”, 푸치니의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레너드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중 “오늘밤”, 프란츠 레하르의<즐거운 미망인>중 “입술은 침묵하고”, 비제의 <카르멘>중 “투우사 입장의 합창”, “하바네라-사랑은 자유로운 새”, “투우사의 노래”까지 한 곡 한곡 노래가 끝날 때마다 관중들은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가수들의 그 수준 높은 연기력과 열정의 무대 앞에서 “브라보”, “부라바”, “부라비”를 연호하며 열광하고 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일어서서 끝없는 갈채를 보낸다. 객석의 요청에 못이긴 오페라단은 두 곡의 노래를 더 들려주었다. 그 두 곡을 더 듣고도 관중들은 계속 해서 기립박수를 보내며 앙코르를 요청하고 있다. 이번엔 객석의 열정에 무대 뒤로 들어간 오페라단이 더 감동을 받았다. 두 곡 이상의 앙코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국립 오페라단의 전통을 깨고 카푸아의 곡 <오-솔로미오:o sole mid>까지 부르고 나서야 겨우 공연을 끝낸다.
거울 속 풍경은 다시 영광 공공도서관 회의실. 객석엔 약 80여명의 청중들이 앉아있고 연단에서 조선대학교 이동순 교수가 “남도문학 일 번지, 그 찬란했던 영광의 문학”이란 주재로 강의를 하고 있다. 영광의 문학에 대해 자신이 연구한 두 편의 논문을 바탕으로 영광의 문학에 대해 강의하는 이교수의 진지함 못지않게 청중석 또한 진지한 표정들이다. 청중석엔 문학인들뿐만 아니라 전혀 문학과 관련이 없는 다수가 앉아있다. 약 한 시간 가량의 강의가 끝나고 현관으로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오늘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어”, “영광이 이렇게 위대한 곳인 줄 이제야 알게 되었네”, “영광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네”, “문학이 단순히 문학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회 전반에 이렇듯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미처 몰랐구만”.…….
다시 거울 속엔 아포리아의 대한민국이 나타난다.
아우성치고 몸부림치는 저 갈대밭에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게 할 지휘자가 진정 이 나라엔 없단 말인가? 수천수만의 갈대들이 가을바람을 음미하며 함께 노래하고 춤추게 할 이 나라의 리더들은 지금 부재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