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성 국립나주병원장

흙속의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

영광고향사랑 21명 전문가 집단 군정자문위원 구성

 

 

산재의료원 70년 역사상 처음 의사출신 차관급 이사장 임명

자신이 걷고 있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기쁜 일이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흙속의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정효성 국립나주병원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영광사람 정효성 국립나주병원장은 최근 고향 영광사람(교수, 연구원, 현직 공무원, 법조인, 금융인, 의료인)을 중심으로 하는 21명의 전문가 집단 군정자문위원에 구성됐다. 정효성 원장은 전남 영광군 군남면 도장리에서 태어났다. 도장리는 다른 이름으로 장고부락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도장리에 장군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 원장은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이면서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 선생의 후손이다.

정 원장은 이곳에서 여느 시골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군남초등학교와 군남중학교(영광남중) 시절 정 원장은 꽤 공부를 잘했다. 마을의 같은 또래아이들 12명 중 대학에 간 사람으로는 정원장이 유일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약방을 권유한 영향이 컸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정 원장은 약대보다는 의대가 더 비전이 있겠다는 판단아래 의대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취직을 안 하고 대학을 간다고 해서 꾸중도 들었다.

의대로 방향을 정한 후 정 원장은 의대 합격을 위해 물리정석을 외우다시피 공부를 했다. 취약한 과목인 영어를 보완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하나였다. 그리고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으며 1978년 졸업했다.

이후 정 원장의 경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조선대 의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와 법제위원장을 역임했다. 의협회장이 바뀌면 간부도 바뀐다는 일반적 관례를 깨고 최초로 2000년부터 2006년까지 6년간 법제이사를 연임했다. 이 시절 최초

로 의사들의 의료사고에 따른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공제제도' 를 만들어 시행했다. 2008년 산재의료원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출신의 차관급 이사장에 임명됐다.

이와 함께 정 원장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정 원장은 의학박사이면서 동시에 법학박사이다. 그리고 정 원장은 차관급인 산재의료원 이사장에서 한참이나 낮은 직급으로 옮긴 이력도 가지고 있다.

정 원장이 이전 보다 더 낮은 직급으로 옮긴 곳은 다름아닌 바로 고향이었다. 정 원장은 30여년이 넘는 출향생활을 접고 고향에 봉사하고자하는 마음 하나로 광주시 최선을 다하고자

북구보건소장으로 내려왔다.

정 원장은 20108월부터 201257일까지 북구보건소장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59일 정 원장은 국립나주병원장이 되어 현재까지 전국 최고의 정신병원을 만들고자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러한 정 원장의 삶의 단면을 통해 평범함 속에서 가치있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삶의 철학 일에 있어서는 성실’,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실한 마음

정 원장은 삶의 철학을 일에 있어서는 성실이다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실한 마음이다고 강조한다. 특히 정 원장은 CEO가 돼서는 솔선수범배려를 삶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작은 성취들을 이룬 것 같고, 주변의 인정도 받았다. 또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진솔한 삶(가식없는 삶)’이었다.

정 원장은 의학박사이면서 법학박사인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병원을 개업해서 운영하다 보니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는 의사이면서 법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드물어 이 같은 의료사고들에 대한 정확한 사실규명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로 인해 소송 또는 병원 앞 농성 등 의료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현실이 저를 안타깝게 했고, 이를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2002년 법학박사(형법)를 받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의사협회 신문에 특별논단으로 많은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특히 정 원장은 보람있게 살아왔다. 그 이유는 특별한 시기를 정하기는 무리일 것이다면서 전반적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가정을 꾸리고, 개업을 해서도 가족과 환자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했다. 환자들에게 진실로 힘이 되어주고자 애썼다. 이것들 모두가 저에게는 소중한 기억이고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최우수레지던트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 상이 지금도 값지게 여겨지는 이유는 병원 전체 레지던트 중 딱 1명에게만 주는 상인데다, 심사가 엄청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병원장, 진료부장, 간호과장, 전 병동 수간호사 등이전체 레지던트 500명 중 1명을 선정했던 것으로 기억이난다원형탈모에 뼈만 앙상하게 남았을 정도로 고단했던 수련의 생활동안에도 저보다는 다른 병원관계자들을 먼저 배려했던 모습이 이 상을 받게 했던 듯하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시절의 일도 기억에 남는다면서 전 강동구 법제이사에서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가되어 2대에 걸쳐 6년간 연임을 했다. 산재의료원동해병원장이 되어서는 병원협회 법제이사를 4년간 연임했다고 말했다.

정 원장이 이 기간 동안 보람이 있었던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사들의 의료사고에 따른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험회사로부터 2억까지 배상책임을 받을 수 있도록한 공제제도를 만들어 시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의사들과의 소송에서 승소한 일이다.

당시 한의사들이 CT판독을 하겠다고 해서 2년간 소송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소송결과 한의사들은 독자적으로는 CT판독을 할 수 없고, 방사선과 전문의들의 판독을 받아서 환자 진료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산재의료원 이사장이 되었던 일이다. 차관급 이사장이라는 감투보다는 정 원장의 깨끗함이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큰 보람이었다. 이사장에 공모를 할 당시 여러 기관에서는 저에 대한 신상을 조사했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지만 먼지가 안 났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11:1의 경쟁률을 뚫고 산재의료원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출신 이사장에 임명됐다.

산재의료원 이사장으로서 인천중앙병원, 대전중앙병원, 태백중앙병원, 안산중앙병원, 창원병원, 순천병원, 동해병원, 정선병원, 경기요양병원 등 9개병원을 근로복지공단과 통합되기 전까지 관장했다.

재능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갈 것

정 원장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보람이 있었던 일은 두어 가지다. 동해병원장 시절 MRI를 들여 놓아야 하는데 예산이 10억밖에 책정이 안 되어 있었다. 반면 창원병원에는 15억이 책정되어 있었다. 10억으로는 도저히 이 기계를 살 수 없어서 산재의료원에 아이디어를 냈다. 창원병원과 동해병원의 예산을 합산해서 2대의 MRI를 사자는 것이었다. 결국 12.5억에 MRI를 사서 동해병원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또 노동부 자금 42억원을 따내 동해병원에 3층짜리 장례식장을 건립한 것도 기억에 난다. 이름도 공모를 통해 승모원이라고 지었다. 북구보건소장으로 재임했던 21개월도 보람이 있었던 기간이었다. 처음에는 오해를 많이 샀다. 차관급인 산재의료원 이사장까지 했던 사람이 그 보다 훨씬 직급이 낮은 보건소

장으로 온다니 말들이 많았다. 가장 큰 오해는 북구청장에 도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후에 어떤 강연자리에서 두 시간동안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님을 설명하니 이해가 풀렸다. 보건소장 재임시절 감사원 감사에서 진짜 일 잘 한다는 평을 받았을 때, 그 보람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 원장이 고향으로 내려온 이유는 아쉬움이었다. 직급은 중요하지 않았다. 길지 않은 남은 인생을 고향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동해병원장과 산재의료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 성과들은 그 지역민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갔다. 그걸 지켜보면서 이러한 혜택들이 저의 고향에도 베풀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광주로 내려오라는 광주시의사회의 권유도 한몫을 했다.

정 원장이 꿈꾸는 국립나주병원은 전국 5개 정신병원 중 나주병원이 최고가 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5개의 정신병원이 있는데 나주병원은 의사의 실력, 전문인력, 시설 등의 인프라면에서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병원 구성원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긍지를 갖고 좀 더 나주병원이 변한다면 더 나은 병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를 위해 제가 전개하고 있는 운동이 바로 ‘I first’이다. 이 운동은 먼저 인사하고, 먼저 칭찬하고, 먼저 솔선수범하고, 먼저 배려하고, 나부터 먼저 변화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년만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저부터 솔선수범하고 있다.이와 함께 자생조직의 활성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운동과 관련이 있는 모임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건강해야 일도 잘 할 수 있다는 평소신념 때문이다. 현재 나주병원에는 테니스, 배드민턴, 축구, 산악회, 탁구부 등의 자생조직이 있는데, 정 원장이 다관여하며 함께 하고 있다.

정 원장은 앞으로 어떠한 삶의 계획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현직에 있을 때는 의료분쟁 예방과 대책을 주제로 필요한 곳이 있다면 강의를 하러 다닐 계획이다. 이 주제를 가지고 광주시의사회, 순천시의사회, 전남의사회, 노인병학회, 광주·전남내과지회 등에서 강의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은퇴를 하면 의료봉사는 꼭 할 것이다. 이 사회를 위해 정 원장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의료봉사는 해외에서 하고 싶다. 국내에는 어느 정도 의료봉사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프리카 등지에 있는 오지의 나라는 아직도 기본적인 의료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포경수술 하나만으로도 에이즈를 많이 예방할 수 있다.

영광사람 정효성 원장은 재능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있다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달려갈 것이다 

 

정효성 국립나주병원장은……,

-전남 영광군 군남 출생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6)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원 졸업 (형법)

-대한의사협회법제위원장 역임

-산재의료원 동해병원장 역임

-산재의료원 이사장 역임

-광주시 북구보건소장 역임

-국립나주병원장

-고향사랑 영광군정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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