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은 - 그의 정파적 기백과 순수성이 시 정신으로 묻혀났다

남령 조영은(曺泳恩)은 당시의 명문이며 한·일공학인 목포상업학교(5년제)를 졸업(19383)하자, 김제에 있는 전매서에 취직해 근무한 그해 11월에 동아일보사가 현상 모집한 단편소설 익어가는 가을이 당선되고, 19393월부터 4월까지 연재되기 시작하자, 19393월에 직장을 버리고 일본 동경으로 고학 길에 오른다. 이 땅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서 인지, 남령의 인생행보는 이처럼 빨라져만 간다. 내가 동경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383월부터이니, 그의 입성은 1년 후가 된다.

나는 나의 종제 태영으로 부터 그와 한 직장에서 같이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있었다. 종제가 근무 중인 대 출판사 미카사쇼보에 자리를 마련해 놨고, 남령의 둘째 형 영규(후일에 이라 개명)가 동경대 법정대학 고등사법부 지리과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남령은 그곳 영문과를 택하게 된다.

그들이 출판사에서 하는 일이 서적창고에서 전국 서점으로 책을 공급해주는 비사무적인 일이 주가 되었다.

이 출판사는 헤밍웨이전집을 처음 출간 할 정도로 첨단을 걸었으며, 문학서적 출판도 활발했던 미카사의 창고지기 두 사람에게는 책속에 파묻혀 온종일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일터였다.

이처럼 그들은 동경의 공습 속에서도 학업을 마치고 금의환향하여 해방에 대비하게 된다.

나와 남령은 동경에서 젊은 날 3년간을 가장 가까운 고향 선배로서 의기투합하는 문학 동지로서 생활했다. 참으로 그것은 다행한 노릇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내가 먼저 동경생활을 졸업 후 1년 체류로 마감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창작 활동과 함께 우리는 좀 더 다른 세계를 통해 더욱 다르게 접근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그에 대한 추천사에서 다정다감하고 명민 쾌활한 청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그의 정의파적 기백과 불의를 보고도 본체만체 못하는 기질이 우러나온다. 일제하에선 아직도 자기 입장이 정립되지 않은 데다 공부 욕심과 문학에의 정열 때문에 고개를 숙이기로 작심했겠지만, 해방된 조국 내나라에서야 어디 남의 나라 보듯, 구경만 하고 있으랴! 라는 그의 순수성이 그의 시정신과 어우러져 단심가적 행동파로 치닫게 한 것에 불과하다.

시조 시인이며 시평론가인 한춘섭님은 그의 남령 조영은의 시조시 진단첫머리에서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심정으로 왜 남령은 북으로 사라졌을까? 한 인간으로서의 야망도 꽃을 피우지 못한채...”라고 적었다.

나는 당대의 각 방면의 걸친 엘리트들의 대거 북행사태는 주변상황에 의한 나름대로 신념을 가진 고뇌 끝에 내려진 결단 이었겠다. 단지 꽃을 피우지 못한 것만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의 실존적 주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남령은 아깝기에 앞서 안타갑고 섭섭하고 아쉬울 뿐이다.

19443월 태평양 전쟁이 가열해지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다급한 상황으로 전문학교 패쇄 임시조치령 발동이 검토 중이었기에, 나의 교단생활의 첫 기념탑인 아끼는 제자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고자 음악교사 이신 이석화에게 작곡을 부탁하고, 남령에게 착사를 청원했다. 여기서 태어난 것이 냠령의 유일한 그리고 처음 공개된 일본어 작시인 나는 비나이다이다

1. 나는 비나이다, 그대를 위하여.

행복하여라, 그대의 출범.

마음의 괴롬은 씻으면 되고요,

그대의 별은 빚나지이다.

2. 나는 비나이다. 그대를 위하여.

씩씩하여라, 그대의 출범.

진실함이여, 어머니의 길

그대의 별이 빛나지기를

 

 

이 시를 우리말로 옮겨 놓고 보니 아무래도 일본가사만 못하다. 남령은 일본어 표현에도 능숙했었는지 모른다. 그가 영문과 3년을 마치고 일본문과에 학사 편입한 까닦을 알 것도 같다.

남령의 춘부장 조륭현(1881-1957)씨는 영광광흥학교 출신으로 일본 최고 지성지 개조(改造)의 열성적인 구독자로서 과묵하고 근엄하신 선비형 지식인이었지만, 세상을 등진 듯한 은자 행세를 하였음은 오로지 수재형으로 향학열이 불타고 있는 자식(42)들의 장래를 헤아리신 은인자중한 것으로 짐작된다.

남령은 조운과 감방 창을 두고 밖과 안에서 젊은 시인과 노대가가 시로서 교감한 시를 적어본다.

 

 

내살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아프겠소

내몸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추웁겠소

덜덜덜 창 떨 때마다 마음 저려 하외다.

 

 

눈보라 덧치던 눈 얼마나 억찼을까

창 앞에 매었던 덕대 부러졌단말가

노래도 저 넝쿨에야 새 움 자라나겠지

물무 뒷산에는 진달래 폈답니다.

구름다리 시냇가엔 살구꽃 피겠지요

그 꽃잎 나의 발인양 살창 속에 넣리까.

 

 

이 무렵 옥중의 조운은

 

 

한번 눕혀 노면

옆에 사람 어려워라

돌아도 잘못 눕고

자다 보면

그저 그밤

파랗게

유리창 찬서리에

반짝이고 있고나

 

 

이렇게 두 사람은 시로서 교감하였다.

내가 이제 회수를 넘긴 나이에 남령 조영은 그 문학세계에 길다란 서장을 쓰게 되다니 인연도 인연 이려니와, 기이하고도 기이하다 

 

조 운 - 시세계의 문학성과 사상성은 시대적 배경에서 잉태

조운(曺雲)하면 석류(石榴) 할 정도로 논자나 애독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박홍원님도 여기에 동조하면서 속에서 넘치는 알알에 겨워 / 벌어진 단단한 석류여 / 연달은 발견에 달아오른 소슬한 이마를 보는 듯 하다로 시작되는 뽈 발레리의 석류도 명시지만, 그에 못지않게 조운 시조 중의 명편이라 한다.

민두기님에 따르면, 젊어서는 이 시가 사랑노래로만 보였지만 실은 어지 할바를 모르게 답답한 가슴속에 성한 마음을 지닌채 살아가야 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읆은 것으로여기게 되었다는 건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조운의 시를 그 문학성 이전에 사상성을 강조하고, 이에 주목해 온 나의 논조를, 순수파 측에서 탓할지는 모르나, 그가 살아 온 전통의 시대가 시인의 의식을 일깨웠고, 그래서 불의 앞에 불굴하는 의지와 도덕적 용기가 속구쳤으며,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와 또 그것을 초극하기 위한 몸부림과 그것을 통한 엄청난 결단의 과정, 그것이 조운의 정신적 역정이었음을 감안 할 때, 위대한 문학성 속에 담긴 엄청난 사상성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 연관에서 그의 걸작의 하나 석류는 시조중의 시조임과 동시에 어김없는 사상시이며 저항시다.

그때 그 시절을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공감이 갈 만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 수봅이 아니면, 그리고 빠져 나갈 길이나 변명할 수 있는 도피구의 준비 없이는 발표의 길 도한 없었음이 저간의 사실이 아니던가.

이 명편은 연애시 중에서도 격렬한 연애시로서의 의상조차 걸쳤다. 영락없는 변장이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탈출구 마련인 것이다.

빠개젖힌 이 가슴알알이 붉은 뜻보소라 임아 보소라인 것이다.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고, 또 재전환이 크게 요청되는 대목이다. 인간에의 사랑, 혈육에의 개인적인 사랑, 그리고 야국에서와 같은 한 여인에의 뜨거운 정감없이는. 조국에의, 겨레에의 붉은 뜻도 있을수 없다는 선례를 우리는 하인리히, 하이네에게서 역력히 보았다.

 

 

석류

투박한 아의 얼굴

두툼한 아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일제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온 겨레가 질량간 정도차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항일 의식은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지도적 입장에 선 이의 경우, 사고와 행동의 일거일동 또는 일거수 일투족이 그 의식의 직간접적 표현 아닌 것이 없고, 꼭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비록 표현방식의 농담과 심천의 차가 있더라도, 그와 같은 시각에서라면, 답의 근사치가 나올 것이라고 본다.

거시선 이미 순수니 비순수니, 참여니 반참여니, 하는 식의 흑백논리로는 사상의 진실에 접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조운 시조문학의 배경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창조적 작업이 행해진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시대의 사상과 철학은 그 시대의 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란 헤겔의 유명한 말이 있다.

생존권이 위협 받던 시대의 조운과 같은 저항시인과 항일의식이 철저했던 지식인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랴.

친일반민파를 제외한 전민족의 대동단결만이 요청되던 일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사랑하며 성장한 고향 영광이라고 하는 옥당고을의 전국적으로도 개화 물결에 앞장선, 근대적 서구적 문화전통과 백제 패배기의 반신라 세력의 도미를 장식한 이래의 반골정신 전통과, 영과의 이와 같은 개화문화 사회 속에서 그가 점한 위상 등을 고려하지 않고는 조운의 인간과 그 세계를 보는 시각의 대전환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 작가나 사상가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인식의 선행성과 중요성이 요청되는 소이이다.

조운시와 그 사상의 진정한 이해 곧 관념론적 또는 일반원리 또는 일반화 개괄화적 사유방식에 따른 구체적 특수성 또는 실제성의 간과가 범하기 쉬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의 시공적 특수조건으로서의 영광문화의 전통사회에 대한 선이해가 필수조건 이려니와, 여기서는 이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고, 또 우리세대가 지나가면 이 실마리 제공 작업마저 체험적 입장에서 떠남으로써, 진실에 육박하기가 어려울 것처럼 느껴진다.

 

 

파초

 

 

펴이어도

펴이어도 다 못 펴이고

남은 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바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찟어만지고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