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물, 역사적 학술적 가치 지닌 귀중한 문화 유산

법성진 축성 500주년 제막식이 지난 5일 법성포 숲쟁이 공원에서 열렸다.  그간 법성진성은 2002년 11월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2월 법성진성과 숲이 포구와 어우러져 특이하고 아름다운 경관이 인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2호 ‘영광 법성진 숲쟁이’로 승격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법성진성은 남쪽으로 바다를 접한 구릉의 남사면에 평면상 직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기와류․토기류 등 유물이 모두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인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 사용된 성으로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성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우리군의 귀중한 전통문화유산이다.
 군은 현재 성곽 보수 및 민가방향 진성의 성곽 복원까지 종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2015년 국고보조사업 예산으로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용역비 2억원을 문화재청에 신청한 상태이다.  2.5매

성의 실태
  법성포 진내리 947번지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성은, 2002년 11월 27일에 전라남도 지방문화재(제20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지정면적 : 9,683㎡(2,929평), 보호면적 : 6,287㎡(1,901평), 합계 15,970㎡(약 4,830평)

  현재, 이 성은 성의 동쪽 75m, 북쪽 260m, 서쪽 125m, 남쪽 10m 정도의 성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곽 위에 조망정자를 세우고, 서쪽 성곽 아래를 콘크리트로 무분별하게 포장하는 등 관리상태가 부실하고, 남쪽은 민가가 들어서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며, 동쪽 성곽위에 통신기지국을 설치하면서 상당부위가 훼손된 상태다.
  또, 문지 부분도 민간인들이 출입통로로 이용하기위하여 모두 파괴되었고, 관아 터들도 민가가 들어섰거나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동쪽 성벽에는 진원(珍原)과 창평(昌平) 그리고 광양(光陽)의 축성길이가 새겨진 성 돌이 남아 있는데, 진원현의 축성구간은 상동문에서 북쪽으로 약 15m이고 잔존 최대 높이는 약 2.5m 정도다. 또, 창평현과 광양현 축성구간의 잔존 최대 높이는 약 2m정도로 각각 약15m와 30m정도 쌓은 것으로 보이며, 북쪽 성벽의 동쪽부분은 대부분 흙으로 덮였고, 동쪽이 서쪽보다 지형이 낮으나 성벽은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또, 서쪽 부분은 주민들이 경작 로를 개설하면서 성벽 쪽으로 흙을 치켜 쌓아 대부분 묻혀 있는 상태며, 장성 축성길이가 새겨진 성 돌이 성벽에 남아 있다. 성벽의 성 돌에 각자되어 있는 진원, 창평, 광양, 보성, 해남지역은 모두가 중종 7년(1512년)에 전라도 관찰사 남곤의 건의에 따라 영산창에서 우리고장으로 이관된 수세지역들이며, 특히 서쪽 성벽의 보성 80척(尺)과 해남 70척(尺)이라고 각자되어 있는 성 돌 중 ‘......9월 10일 해남 70척 감관(監官) 임회(任會) 도색(都色) 강영호(姜英浩)’라고 새겨진 해남 성 돌은 이 성의 축성연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현재 남아있는 성 돌 중 사료가치가 큰 유물이다. 해남 성 돌의 파손된 모서리부분에는 ‘正德 甲戌 九月 十日(1514년 음력 9월 10일’이라 새긴 것으로 보인다.

성의 규모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등의 사료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시기가 중종 9년 (1514년) (甲戌)이라 하였고 규모가, 둘레 1,688자(尺)에 높이가 12자(尺)라 하였다. 이에 반해 ‘법성진진지’에는 이들 문헌과 달리‘포백척(布帛尺)을 기준으로 둘레가 3,062자에 높이가  8자尺) 7치(寸)’라고 기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성의 규모가 다른데 대하여 기존 향지(1992년)에는 ‘임란 전에는 성의 둘레가 짧고, 후에 길어진 것은 난중에 성을 증축해서가 아니라, 성의 연장으로 심었던 수림(樹林)(숲쟁이)이 크게 자란, 그 숲재 즉, 삼성(森城)의 길이까지를 합산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의 기록인 ‘여지도서’와 기타 사찬(私撰) 등의 기록, 모두에 법성진의 규모가 임란 전의 규모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 수림대를 성의 길이로 합산하여 기록한 사례가 없어 숲쟁이의 숲은 인공 방풍림이지 법성진성의연장선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서’에 이 성의 절반이 무너진 상태였다는 기록과 순조 7년(1807년)(丁卯) 11월(음력)에 있었던 대 화재 후에 법성진을 재정비하였다는 ‘일성록’과 ‘비변사등록’의 기록, 그리고 성의 남쪽 지역에 남아 있는 무장현의 축성 성 돌로 미루어 순조 7년 대 화재 후 법성진은 관아와 민가를 구획하여 옆의 지도에서와 같이 A지역에는 관아를, B지역에는 민가로 재편하였기 때문에 순조 7년을 전 후로 성의 규모가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앞으로 지표조사 등을 통하여 더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다.

 

 성 내․외 유적
  순조 7년(1807년) 대 화재 후, 법성진의 현황은 ‘법성진지도’(1872년)와 폐진(廢鎭) 당시의 기록인 ‘법성진진지’(1895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법성진의 동헌은 5칸, 아사(衙舍)는 10칸, 문루(門樓)는 3칸, 군기고는 4칸, 화약고는 1칸, 집물고인 해창은 5칸이었으며, 군량을 보관했던 군향고인 남고는 8칸 등이었다. 그리고 세곡을 검사했던 6칸의 동조정과 광주 등 12고을의 세곡고가 있었고, 법성진이 폐진된 1895년에 이르러서는 성이 중간 중간 많이 무너지고 훼손된 상태였다.
  기타 ‘법성진진지’(1895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1872년과 1895년에 제작된 ‘법성진진지도’모두에 사창(社倉)과 장시(場市)가 표기되어 있다.
  법성진 관내 진량면의 구호기관인 사창은 흉년이 들거나 천재지변 등의 재난으로 굶는 백성이 생기면 이들을 구호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어 생업에 종사토록 하기 위하여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며, 장시는 시장(市場)이다.
  2010년 현재, 진성(鎭城) 내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법성진진지도’(1895년)에 색인되어 있는 관아와 부속건물의 옛터(遺址)로 이 노거수들이 과거 법성진 관아의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존 향지(1992년)에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제월정(霽月亭)의 성격이다. 제월정는 분명히 이척(李滌)이 사적(私的)으로 낙향 후에 건축한 풍류정(風流亭)인데, 지도상으로도 성내에 있으며, 진지에서도 관아로 간주하고 있으니 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진은 관아와 민가가 구획되어 성내에는 관아와 군영, 그리고 세곡검사소인 동조정과 객사 등이 자리하였고, 성 밖에 민가가 자리하였기 때문에 1895년에 편찬된 지도에는 제월정이 관아에 포함되어 않은 성 밖의 풍류정으로 표기된 것이다.

법성진성 복원 정비계획 (안)
 - 2015년 국비 지원사업 종합정비 기본계획 용역 2억원 신청
 - 예산 반영시 약 10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
▲ 진도군 용장성 복원사업의 경우 (문화재부서에서 추진중)
- 종합정비계획 용역 추진으로 사업범위 및 년차별 투자계획을 수립하여 추진
- 대규모사업으로 1984년부터 시발굴을 통하여 복원사업을 시작하였으며, 2013년 종합계획 수립시 7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시․발굴 결과에 따라 다음연도에 복원사업비를 확보하여 추진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음

□ 문화재 현황
 ▲법성진성 (지방기념물 제205호)
  법성진성은 남쪽으로 바다와 접한 구릉의 남사면에 있으며, 평면상 직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688척 높이 12척으로, ‘동국여지지’에는 둘레 1,688척으로 ‘법성진진지‘에는 둘레 3,062척 높이 8척7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광 법성진성숲쟁이 (명승 제22호)
 영광 법성포에는 수군 첨사가 주재하는 수군 진으로 일찍이 진성이 구축되었으며,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조창으로 조기와 굴비로 유명한 파시가 열린곳이다.
 숲쟁이는 북풍으로부터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숲으로 법성포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우며, 조창과 파시와 관련한 단오제 등 지역의 각종 민속행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고으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