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영광의 바람은 어머니의 목소리이고 칠산바다는 내 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생명의 모태다.

바다의 소곤거림, 밀려오는 파도소리, 그 명주바다, 몽환의 바다...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다 자식 하나 흘려놓고 가버리면 그 어린 자식은 어떻게 사나....?

생명의 모태인 어머니의 양수에 기댈 수 밖에...죽어 영광에 묻힐 수는 없어도 영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내 생명의 모태인 칠산바다를 흐르고 싶다.”>

<“이 곳 염산은 내 작품의 고향일세

이제 그만 스스로를 가두었던 감옥의 빗장을 풀고 나오시지요, 그래야 새로운 작품이 나옵니다.”

그러고 싶은데 나에겐 과거만 있고 현재가 없네 그래서 나도 답답할 뿐이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과거에 대한 나의 기억이 오늘의 나이지요. 그러니 모두 끌어안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향해 가야죠”>

세월은 참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외로움에 몸부림 치면서도 마냥 행복했던 오래 전 그 날들이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 되지만 금년 설은 서로의 안부도 묻지 못한 채 그렇게 보내버리고 말았는데 벌써 잠 못드는 문 밖엔 수줍은 듯 서성이는 바람과 정월 대보름을 향해 가는 초승달의 은은함, 그 별래(別來:작별한 이래) 이후의 별정(別情:이별의 정)을 고즈넋한 나의 방으로 끌어들이는 저 작은 창문이 고맙기만 한 밤입니다.

별루(別淚:이별의 눈물)도 없이, 별배(別杯:이별의 잔)도 없이, 별부(別賦:이별의 노래)도 없이, 별사(別辭:이별의 인사)도 없이, 별수(別愁:이별의 슬픔)도 모른 채, 별장(別章:이별의 시) 한 절구도 남기지 않은 우리들의 별로(別路:이별의 길) 위엔 별후(別後:이별 뒤)의 별한(別恨:이별의 한)과 별정(別情:이별의 정)만이 샤를르빌의 고독한(상처받은) 영혼, 랭보의 그림자처럼 남아있네요.

이제 머지 않아 봄날의 뻐꾸기는 창자가 뒤틀리도록 그렇게 배고픈 소리로 울어댈 것이고, 칠산바다 저녁노을은 소실점(消失點)이 사라지듯 수평선 너머로 아득히 물들어가겠지요, 그리고 가을 바람의 향기는 나옹선사의 시처럼 소나무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 어디론가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그 먼 길을 향해 가겠지요? 가을이 깊어질대로 깊어지면 낙엽이 지고 하늘은 차가운데 우리들 마음 속으론 페르시아 공주의 얇고 투명한 옷자락 같은 밤눈(雪夜)이 또 소리없이 내리겠지요? 세월은 또 그렇게 부지런히 가겠지요?

내일을 끌어당겨 오늘을 밀어내는 어제를 바라보며 죽자사자 앞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삶이 참 버겁기도 하네요. 사회적 다중적 정의(正義) 앞에 개인적 인간적 정의(情義)가 압살 당하는 세상이 참 쓸슬하기도 하네요. 그 쓸쓸함에 빗대어 나는 또 누군가 들어줄지도 모를 넋두리를 해봅니다.

쓸슬함엔 두가지 유형이 있지요. 지나친 욕심 때문에 오는 쓸쓸함과 마음을 비워버린 데서 오는 쓸쓸함. 욕심에서 오는 쓸쓸함은 고통이고 비운데서 오는 쓸쓸함은 기쁨이지요.

그런데 제게 있어 쓸쓸함은 양쪽 모두가 고통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 중에 신뢰의 마음과 불신의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인간 밖에 없지만 그래도 믿음의 가치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하다고 스스로 다짐 하면서도 아직도 마음 하나 머물 곳 찾지 못하고 있네요.

나의 마음아 너는 지금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또 하나의 희망을 마음에 품습니다.

별로(別路)가 아무리 아득해도 오는 봄길 따라 걷다 보면 철쭉꽃 피거나 장다리꽃 피어나는 어느 날 하루쯤 내 쓸쓸함에도 회포의 정배(情杯) 한 잔 봄꽃으로 피어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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