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기/ 난원영광노인복지센터장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친 어느 남자가 서둘러 자신의 외딴 집으로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몹시도 험하고 가팔랐습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주변은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캄캄한 오솔길을 더듬더듬 넘다가 그만, 돌 뿌리에 걸려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몸이 성할 순 없었습니다. 양 무릎에는 피가 철철 흘러,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넘어진 남자는 일어설 엄두조차 못 내고 그곳에 널브러진 채, 가쁜 숨만 연신 몰아쉬었습니다.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하필이면 갑자기 세찬 비바람마저 몰아쳤습니다. 옷차림이 가벼웠던 남자는 이윽고 오한과 두려움으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야속한 시간은 덧없이 흘러만 갔습니다.

악몽과도 같은 긴 밤이 지나고 어느덧 새벽을 여는 동이 어슴푸레 트기 시작했습니다. 천우신조일까.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일단의 무리들이 운 좋게 우거진 숲 풀 속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눈에 봐도 남자의 상태는 몹시 위독해 보였습니다. 무릎만 깨진 게 아니었습니다. 넘어 질 때 오랜 고목과 굴러온 큰 돌이 남자를 덮친 까닭에 팔은 골절됐고, 갈비뼈도 부러졌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나무 가지에 찢겨져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머리에도 큰 상처를 입어 흡사 시체와 같았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심한 출혈, 그리고 체온마저 급격히 떨어진 탓에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소리쳤습니다. “숨을 쉬고 있어요. 이 사람이 숨을 쉬고 있어요!” 워낙 외진 곳이라 구급차는 한참 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제야 남자는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친절한 의료진 덕분에 남자는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흡과 맥박은 이미 약해진 상태였고, 고통에 겨워 내뱉는 신음소리도 가녀리기 짝이 없었습니다.

응급조치 후, 큰 병원으로 옮겨진 남자는 급히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오랜 수술 끝에 남자는 가까스로 생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이 환자가 살아나다니. 정말 기적이군.”

순간 의료진의 눈길이 한꺼번에 남자의 손으로 모아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남자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이내 궁금해진 의사는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남자의 손가락을 펴보라고 했습니다. 간호사는 남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펴보았습니다. 거기엔 한 장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남자와 그 가족들이 환하게 웃는 단란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모진 상처와 무시무시한 비바람에도 남자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이유가 고스란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모두의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남자는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이 끊임없이 밀려왔던 어둡고 추운 외진 곳에서도 그 사진을 끝내 움켜쥐고 있었던 겁니다. 그 사진이 남자의 생명마저도 움켜쥐었고, 결국 남자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없는 고비와 포기의 유혹에서 남자의 생명을 붙들게 한 힘은, 다름 아닌 그의 가족이었던 겁니다.

다행히 남자는 의식을 되찾았고 심장도 힘차게 뛰었습니다. 남자의 심장 속에 그의 가족들이 분명히 들어 있으리란 걸 의사와 간호사는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숙연하게 바라볼 때쯤, 파리한 남자의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가더니 그 사진을 가져다가 다시 움켜쥐었습니다. 옅은 미소가 남자의 입가에 스칩니다. 그를 강하게 만든 것도, 참고 견디게 만든 것도 바로 그의 가족이었던 겁니다.

너나 나나할 것 없이 모두가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생, 저마다 버거운 삶의 노정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와 즐거움을 찾아가며 살아가나 봅니다. 어느 누군들 세상살이가 늘 편하고, 행복하기만 하겠습니까. 중년의 남성. 감당하기 벅찬 고통과 견디기 힘든 어려움으로 괴로울 때가 많겠지요. 이래저래 힘들고, 그림자처럼 지겹게 따라다니는 스트레스로 삶이 아프기도 하겠지요. 때론 가장(家長)이라는 이름표가 무거운 책임감이요, 나를 짓누르는 짐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 지기에 이 험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나 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거기에서 기쁨과 희망도 찾아가고 말입니다. 가족은 나를 지탱해주는 최후의 보루이고,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재산입니다. 오늘도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의 중년 남성. 약하면서도 가장 강하기에 당신을 응원합니다. 새벽안개 속을 걷는 듯한 필자의 이 뜬금없고 선문답 같은 글이, 중년 남성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당신이 최고입니다. 중년 남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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