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미안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울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아파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정(人情)이야 뒤집히는 물결 같은 것이라지만, 그래도 이 하늘 아래서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불가사의 한 인연일진데, 바쁘다는 일상(日常)의 구실로 가까운 주변 하나 들여다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작은 뜨락에서 으스스 낙엽이 바람에 휩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낭만의 밤으로만 느끼기엔 너무도 아팠을 이 가을밤을 형언할 수 없는 아픔으로 견디면서,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며 얼마나 깊은 시름에 가슴을 앓고 계십니까? 생각할수록 야속하기만 한 인생사에 깊어만 가는 가을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얼마나 깊은 속울음을 홀로 울고 계십니까?
몰랐습니다. 그렇게 아프다는 것을, 그 아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조차도 아직은 정확히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합니다.
금년에도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연간집을 내야 하기에 모든 회원들에게 원고 청탁서를 보내고, 연세가 지긋하여 컴퓨터 활용이 어려우신 회원들의 작품은 해마다 그러 했듯이, 올해도 자필 원고를 취합 해 내가 타이핑을 하고 이-메일로 출판사에 송고해야 한다.
70대의 여성 회원이신 00님도 그 중 한 분이다. 10월의 막바지에 그 분의 원고를 받기 위해 미리 전화를 드리고 댁으로 방문 했다.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신다. 70이 넘게 살아온 세월의 잔주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직까지 청순한 소녀의 심성 그대로다. “강선생 수고가 많네. 미안해서 어쩌나, 이 것은 내가 자네 집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니 전해주게” 하시면서 여성용 양말 두 켤레와 젤리 봉지를 원고뭉치와 함께 건네주신다. 그리고 필자가 술을 즐긴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셨는지? 이번 방문에도 어김없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와인 한 병과 손수 담그신 살구주 한 병을 내 손에 들려주신다.
집으로 돌아와 그 분의 작품(시)을 타이핑 하는데 시가 너무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지금까지 그 분이 쓰셨던 작품과는 경향이 너무도 달랐다. 깊은 슬픔과 아픔이 전 작품에 배어 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초가지붕엔 박 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심고/들장미로 울타리 엮어/마당엔 하늘을 디려 놓고 밤이면 별을 안 고/부엉이가 우는 밤도 외롭지 않겠소//기차가 지나는 마을 놋양푼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여우나는 산골얘기를 하면삽살개는 달을 짓고/나는 여왕보다 더욱 행복하겠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노천명의 시를 사람들에게 줄줄이 암송해주실 정도로 그 시를 좋아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그 시처럼 살아가며 행복해 하시는 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무서워 고향인 영광으로 귀향을 했고, 손바닥만 한 텃밭이 달린 조그마한 세간도 마련하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자신이 그 텃밭에서 손수 일군 푸성귀들로 반찬을 만들고 조촐하나마 정성을 다해 식사 대접 하는 것을 행복해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자신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고 보니 그 얼굴에선 한 점 그늘이나 티글만한 수심도 찾아볼 수 가 없고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청정무구의 가을 하늘이거나 봄 날의 맑고 잔잔한 호수 같은 표정이었다.
원고를 마무리 하고 송고까지 마친 뒤 이틀 쯤 지나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선생 작품은 강선생이 알아서 잘 처리해줘. 실은 이번에 작품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어쨌든 부끄럽지만 강선생이 알아서 정리 좀 잘 해 봐...”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신다.
“네 이미 작품은 출판사로 원문 그대로 타이핑해서 보냈어요. 그런데 혹시 무순 일 있으셔요?” “왜” “금년에 쓰신 작품들이 한결같이 아픔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요” 내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저 편에서 그 분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왜 그러셔요? 혹시 무순 일 있으셔요?” 깜짝 놀라 수십 번을 되물어도 그저 목메인 흐느낌 뿐이다. 그토록 맑고 고운 심성으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살면서 행복해 하시던 그 분에게 도데체 무순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몇 몇 지인들을 통해 물어봐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픔에 대해선 지금까지 남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몇 몇 지인들의 추측과, 그 분의 시를 연결해보니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간다. 이 가을밤이 결코 낭만일 수만은 없었을 그분만의 아픔이...외람되게도 그 분의 아픔을 그 분 (작자)의 필자가 먼저 세상에 내어놓으려 한다.
“엄마라는” 제목으로 그 분이 최근에 쓴 시다.
다 삭은 둥우리/ 무순 힘 있으랴만/ 이름을 어쩌랴!/ 엄마라는...// 흙담에 기대어 피는 코스모스처럼/가냘픈 몸둥이는/보이지 않으니까/울 힘조차 없는데// 나뭇잎새는/다투어 바스락대고/풀벌레는/한이 없구나.
이 가을밤이 더 이상 아픔이 아니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