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향리학회 회원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명소화 사업이 되기까지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석가모니가 돌배를 타고 '칠산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싣고 오던 돌부처를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던져버리고 구사일생으로 '법성포'에 표류하였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이 돌부처의 머리 부분(佛頭)이 파도에 밀려 법성포구로 떠밀려 왔다."

199712, 영광군은 이를 주제로 진내리 '조아머리' 일원에 '마라난타' 불상건립계획을 발표하고, 고증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실시하여, 이 일대에 관광 명소화 사업을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개신교계가 들고 일어났고, 지역주민들은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고 맞서, 한동안 양측의 갈등이 극심하였다.

결국 영광군은 지역여론에 따라 20016월에 첫 삽을 뜨고, 20065월에 경내 조형물이 완공되지도 않은 채, 당시 영광군수의 3선 퇴임시기에 맞춰 서둘러 준공식과 전래 재현 식을 갖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최초 도래지가 "맞다" VS "아니다"

백제불교의 시원은 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등의 문헌에 따라 "서기 384년 백제 침류왕 원년"으로 정립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 당시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이 앞글의 '불두'와 연관된 설화에서 비롯되어 '법성포'라는 설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영광군이 발간한 연구 논문에는 '마라난타''법성포' 도래근거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모두 법성향지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첫째 법성진진지(1895)'법성포'"신라 사신들이 중국을 갈 때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갔다."는 기록을 논거로 하고 있다. , '마라난타'가 이 해로를 이용하여 '법성포'에 맨 처음 발을 디뎠다는 주장이다. 하나 이 기록은 '마라난타'와 무관하다.

1600여 년 전 백제시대 법성면 일원의 중심권역은 지금의 법성포 내가 아니라 '법성포' 동쪽지역의 해로통행이 가능했던 '백제토성'이 자리하고 있는 용성리 '성촌'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며 '법성포' '구수산' 상층부 바위들에 남아 있는 굴 껍질과 조개류 흔적들로 미루어 백제시대 '법성포'는 대부분 바다에 잠겼을 개연성이 높고, '법성포'가 신라교역로였다는 사실 또한 법성진진지에서도 "문헌이 없어 고증하기 어렵다.(不忘而無 可考文徵)"고 하였다. 설혹 신라시대 때 '법성포'에서 중국까지 교역로가 있었다 해도 '법성포'는 백제 땅인데 신라 사신들이 무슨 재주로 이곳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을 왕래할 수 있었겠는가.? 법성진진지에 언급된 신라가 통일신라라 하여도 '마라난타' 도래 시기는 이보다 300여 년이나 앞선 백제시대 이야기다. 따라서 이 근거는 성립되지 않는다.

둘째 법성면 일원의 고려시대 지명인 '아무(阿無)', '부용포(芙蓉浦)', '법성포(法聖浦)'라는 지명이 모두 불가와 연관된다는 논거다. , '아무'는 불가의 '남무아미타불'이 함축한듯하고, '부용'은 불교의 상징 꽃이며, '법성'은 불법을 전하는 승려가 온 항구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과연 그럴까? 이 또한 아니다.

'부용포', '법성포'와 같이 포()라는 호칭을 붙여 지명 화한 시기는 '마라난타'가 백제 땅을 밟고 6백여 년이나 지난 고려 성종 11(992) 이후다. 따라서 이 모두가 고려시대 때 호칭이지 백제시대와는 무관한 지명이고, 법성면 일원의 백제시대 지명은 전래되지 않고 있다. , 세종실록지리지등의 여러 고문헌에는 영광군의 백제시대 지명이 '무시이'라 하였고, '영광군지'(1994)에서는 그 뜻이 ''이라 하였다. 이처럼 백제시대 지명은 고려시대와 다른 뜻이 함축되어 있다. , '법성'이란 지명은 이곳 '법성포' 뿐 만 아니라 조선시대 조창인 '성당창'과 인접한 전북 용안지역에도 있어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 많은 고려시대 지명을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마라난타'와 연관하여 해석함은 무리다. , "남무아미타불을 음차하여 '아무(阿無)'라 하였다."는 논리도 어순이 맞지 않다.

셋째 '마라난타''법성포' 도래 시에 '불두''매향비'를 가져 왔다고 전해진다는 구전이다. 이 근거 역시 잘못이며 사실과 다르다.

'불두'가 자리하고 있는 '굼방모탱이'(군바위 모서리)는 지금부터 78년 전인 1930년에 매축되어 성촌된 지역이다. 매축되기 이전에 이곳은 조선시대 때 조운선이 접안하여 세곡을 실었던 지역으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었다. , 옛날 옛적부터 '불두'가 있었던 곳이 아니라 1930년 이후에 마을이 형성되어 그때부터 '불두'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영광군에서 발간한 영광군 미술사 유적·유물 조사 보고서(1993)에서도 이 '불두'와 같은 석질의 미륵이 "영광읍 '연성마을'에도 원형 그대로 있고, 화순 '운주사'에도 이런 '불두'가 있어 백제시대까지 소급하기는 무리다."라고 하였으며, 법성향지저본인 법호견문기의 저자 신명희(1901~1986)"이 설화는 후대에 윤색된 것이다."라고 한 증언이 생전 육성 녹음으로 남아 있다. 특히 입암리에 있는 '매향비''마라난타'와 전혀 무관한 유물이며, '마라난타'가 올 때 '매향비'를 가져왔다는 구전은 '법성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백제불교최초도래지'는 조성되었다.

 

영광군사의 흐름

법성향지'백제불교최초도래설'은 이제 영광군사에 편입되어 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설이 되기 이전의 영광군지와 주요 사서(史書) 등에는 단 한 줄, 단 한 자도 '마라난타'에 관해 언급되어 있지 않다.

1760, 영조 36년에 저술되었으나 탈고하지 못한 구본에 추록하여 발간한 영광읍지(1897), 영광군지(1899)에도 '마라난타'에 관한 기록은 없다. 특히 순조 연간인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예를 들어 "간월도 - 달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이다. 백련이란 작은 암자가 있는데, 무학이 출생한 곳이며, 송나라 사람 정신보가 자고 간 곳이기도 하다..." 등으로, 각 지방의 풍속과 전설, 유래 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영광군''법성진'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땅에 최초로 불법을 전했다는 '마라난타'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자도 없다.

억불숭유정책을 편 조선시대는 그렇다 쳐도, 일제강점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사람들이 편찬한 조선지지자료(1910), 전라남도 사정지(1931), 영광군세일반(1930, 1934)은 논외로 하더라도 영광 유림들이 편찬한 여지승람(1931)에도 '마라난타' 이야기는 없다.

이러했던 군사(郡史)법성향지(1992)에 뒤이어 출간된 영광군지(1994)에 서술되어 정사가 되었고, 2013년에 출간된 영광군지에는 마라난타가 최초로 발을 디딘 곳이 진내리 '조아머리'."라고 용감하게 단정해 버렸다. 단언컨대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역사는 사실이어야 한다

앞글에서와 같이 '마라난타'의 법성포 도래설'은 문헌도 없고, 논거도 취약하다. 그래서 '마라난타'가 첫 발을 디딘 곳이 진내리 '조아머리'라고 마을까지 친절히(?) 서술할 일은 아니다.

도래지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곳에 상주하는 문화관광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광군의 정사를 이렇게 써 놓았으니 해설사들은 당연히 "1600여 년 전, '마라난타'가 맨 처음 밟은 백제 땅이 이곳 '조아머리'랍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서 계시는 곳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백제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법성포 도래설을 물으면 "글쎄요?"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 문헌이 없어 꼭 집어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헌에 근거하지 않고 도래지를 조성하여 놓았으니, '마라난타''법성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왔다는 문헌이 발견되는 날에는 웃음거리가 되고, '조아머리'는 대 국민 사기극의 현장이 된다.

'마라난타'의 행적과 관련된 문헌이 머지않아 일본에서 발견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정보 화 세상이니까...

그래서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어야 한다. 그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여 현재와 미래세대에게 그대로 전해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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