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전라남도다문화가족지원센터연합회장

빈호아의 한국군 증오비와 자장가

베트남의 빈호아라는 지역에는 한국군 증오비라는 가슴아픈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비석의 머릿부분에는 증오비라는 비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바로 아래 본문에는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라는 처절한 구호문구도 선명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증오비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범죄의 잔혹행위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비에는 “1966125일 한국군 병사들이(비문에는 남조선 병사로 명기되어 있음-필자 주) 빈호아지역의 민간인 36명을 한데 모아 학살하였다. 36명의 주민들 대부분은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비문보다도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 지역의 어머니들이 부르는 자장가이다.

이 곳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재울 때 아이를 눕혀놓고 한국군을 증오하는 내용의 자장가를 불러 준다고 한다.

아가야 이 마을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베트남 빈호아 지역의 어머니들이 아기들을 재울 때 불러준다는 자장가 내용이다.

베트남의 어머니들이 어쩌다 이런 자장가를 부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없는 그들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후대에게 기억시키려는 몸부림을 지난 역사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그들의 생체기가 너무나 크고 아픈 것은 아닐까?

낌다이 증오비

깜다이 마을에도 같은 종류의 증오비가 있다.

질퍽한 논길 끝에 세워진 비석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비문에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주민들의 이름과 함께 원혼을 달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시멘트 탑신 위로는 처형을 기다리는 듯 나무기둥에 묶여있는 여인들과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어린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깜다이 지역 사람들이 증오비라고 부르는 일명 낌다이 증오비다.

비문 머리에는 쯩뜩 깜투라고 크게 새겨 놓았다.

쯩뜩은 증거라는 말이며 깜투는 증오하다.” 또는 복수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과거를 결코 잊지 않고 복수하겠다는 섬뜩한 표현인데 하필 우리 한국군이 그 증오의 대상이라는 것에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로선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베트남 정부에서도 슬픈 역사를 잊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자료조사를 거친 후 역사 유적지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고자이위령비

1966226, 고자이라는 마을에서도 대학살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우리 한국군이 있었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 비문에는 이른 아침시간, 380명의 무고한 마을 주민을 학살하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군의 야만적인 행동들도 비문에 새겨놓았는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무자비한 내용들이다.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도 부족하여 윤간을 한 후 총으로 쏴 죽이고 어린 아이들은 산체로 불에 던져 죽였다.

반공호로 피신한 민간인들은 반공호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어 폭사시키고 짚으로 덮어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탑에는 어린아이를 포함한 주민들을 사살하는 장면과 함께 옷이 찢겨져 있는 여성, 그리고 원망하는 듯 절규하는 노인의 모습 등이 벽화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자이 위령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쯔엉탄 위령관에도 한국군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주민들의 집단 무덤이 있다.

모두 14가구 58명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을 당했던 현장에 무덤을 만들어 안장을 했는데 58명의 주민 중 35명이 어린아이었다고 적고 있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사돈국으로

베트남에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월남 전쟁기간 중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80여건에 달하고 있으며 약 9천여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집단학살을 당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왜 우리는 남의 전쟁에 뛰어 들어 무고한 양민을 죽여야만 했으며 아직까지도 그들로부터 만대에 이어지도록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한 댓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산업을 발전시켜 오늘의 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일만으로 양민학살까지 상쇄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남의 전쟁에 대리로 참여한 우리의 파월 장병들도 피해자임에는 분명하다.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것은 물론 살아 돌아온 장병들은 아직까지도 전쟁이나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이 약이었을까?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왔던 베트남의 전쟁세대들이 그 2세대들을 한국의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고 있다.

한국군의 만행을 잊지 말라는 자장가를 불러 주면서도 그들의 아름다운 2세 딸들을 우리 한국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한국과 사돈이라는 끈끈한 인연을 맺어 서로에게 남겨진 생체기를 보듬어 주려는 고귀한 뜻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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