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세상의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 숲 사이로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 어이 큰 눈물 땅에 뿌리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1987119일 천주교 정평사제단 일원인 문규현 신부에 의해 경찰의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 되자. 경찰측은 ",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물고문 등 각종 고문에 대한 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은 고문에 의한 치사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박종철군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는 단말마적 외마디로 온 국민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자극했고, 언론에 보도 된 그의 누님이 어머니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80년 이후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에 군부 독재에 대한 항거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렇게 불타오르기 시작한 민주화 투쟁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3 국민 대행진을 필두로 해서 이미 계획된 제 26.10항쟁 하루 전인 69일에 출정식을 위한 연대 앞 시위에 참여했던 고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지자 다음날의 항쟁에는 다시 또 무관심과 무의식에 빠져있던 국민들까지 자극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의식을 잃고 빈사 상태에 있던 아들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이군 어머니의 외침은 슬픔과 분노를 넘어 절규였다.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서두에 인용한 글은 79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만 고 이한열군의 영전에 바쳐진 추모시이며 추모곡 내용이다.

그렇게 온 국민이 동참했던 6월항쟁은 6.26 대회에서 사상초유의 100만이 넘는 시위 군중이 운집함으로써,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 실시 등 각종 민주화 실현방안이 담긴 6.29 선언(당시 항복 선언이라 함)을 견인해 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온 국민이 군부독재가 선심 쓰듯 베풀어주는 꿀떡에 취해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하며 역사의식의 망각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민주쟁취를 위해 흘린 피는 이미 그 이전부터 한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또 누가 분신을 했을까? 신문을 펼치기 전의 그런 생각은 막연한 궁금증이 아니다. 이재호도 죽고 김세진도 죽고 이동수가 죽고 성심여대 박혜정이 또 한강에 투신했다. 우리의 4월과 5월은 너무나 잔인한 달이다.

현실과 이상의 엄청난 대립 속에 우리의 후배들은 결국 죽음이란 수단으로 무언의 항쟁을 선택했다. 그들의 주검 앞에서 지금 우리는 무순 생각을 하고 있는가? 가버린 친구의 영전에 바치는 동료학생의 조사를 낭독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장내를 눈물로 채우던 모습들...,

그들의 마음 속엔 어느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억압과 짓눌림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 차원 높은 수준의 슬픔으로 번졌으리라."

8663, 필자의 일기 내용이다.

6월항쟁, 6.29 선언 직후에도 우리는 "아직 민주화는 멀었다" 며 영광에서 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를 결성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대통령 직선제 정국에서 발생된 이념의 좌표는 여러갈래 분파주의에 의해 방향을 잃은 채 독재권력의 하수인 집단들이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득세하는 아이러니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87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단일화 실패, 3당 야합, 대선 패배로 인한 군부 잔재의 연장 집권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까지 탄생시켰지만, 다시 60여년 전의 군부가 정권을 찬탈한 것보다 더 복잡하고 치밀하게 형성된 권력 독재,

자본독재의 모순이 지금의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기에 광화문의 촛불은 다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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