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변혁을 경험하며 당황스러운 삶을 살았던 나이가 58년 개띠들이다. 또한 현대사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 이전 세대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나라를 다시 추스르기 시작했다면 58년 생 개띠는 바통을 이어받아 근대화의 중심을 잡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던 일류 중학교 진학은 이른바 뺑뺑이로 무산되었고, 명문 고등학교 진학은 평준화로 향토장학생의 꿈을 접어야했던 58년 개띠들이 올해 12월이면 공직에서 은퇴를 한다. 이른바 샌드위치 개들의 공식적인 은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의 중간에서, 가부장 중심의 대가족 세대와 현대 핵가족 세대의 중간에서, 또는 한자 문화와 한글세대의 중간에서 샌드위치로 살아야만 했던 아픈 개띠들은 충효사상까지 강요받으며 자신을 잊고 살았다. 위아래 터울로 몇 년은 같은 연배지만 개처럼 살았던 상징적 의미로 58년 개띠는 신구의 연결점에 있었다. 이제 이들은 부모를 모셨던 마지막 세대로 남을 것이고, 자식들에게 모심을 받지 못하는 세대의 효시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후배들이 보기엔 디지털에 어두운 디맹(디지털맹인)’으로, 선배들이 보는 입장에선 예의와 한자 문화에 어눌한 개띠들의 은퇴가 상큼하게 새 출발로 이어질 수 있을까.

병들지 않고 산다면 60세는 인생의 2/3 지점이다. 아직도 30년이라는 세월을 앞에 두고 은퇴를 하는 것이다. 평균 나이로 따져도 2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은퇴라니 당황스런 단어다. 그래서 대다수는 다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사업을 시작하고 취직을 한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어려운 세대를 살아오면서 과연 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던가를. 물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통계는 90%가 부정적이다.

대한민국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 일만하다가 죽는 사람과 돈만 벌다가 죽는 사람이다. 결국 90% 이상이 두 부류에 속한다고 하니 상당히 심각하다. 원인은 우리가 받았던 교육이다. 쇠뇌 되어버린 국가주의에 자신을 잊었다. 돈을 벌면 쓰지 말고 저축을 하고, 국가를 위해선 목숨도 아끼지 말라고 배웠다. 쓰지 않을 돈은 벌 필요가 없고 나 없는 국가는 없다.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며 나라가 부강해야 국민도 잘 산다는 교언과 국산품 애용이라는 애국심을 부추겨 부패한 정치인과 재벌들만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바로 국가주의의 함정이다. 우리는 여기에 속아 가장 소중한 자신을 잊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60의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다. 나를 느끼고 사랑하고 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오늘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는다면 일을 하자. 하지만 삼시세끼 걱정만 없다면 나를 찾아보자. 어려운 시절 지겹도록 일하고 국가에 충성했으면 이제 를 위해 살아도 될 것이다. 유명인들이 쓴 생활지침서를 읽을 때만 고개를 끄덕이지 말고 생활로 옮겨야 한다. 그래도 일이 좋고 통장에 늘어가는 숫자가 기쁨이라면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의미는 없다. 돈은 쓰지 않으면 숫자에 불과하다. 많이 베푸는 자가 부자고 많이 받는 자가 거지다. 통장의 숫자만 늘리는 거지보다는 베푸는 가난한 부자가 행복하다. 취미 활동을 권하면 여유가 없다고 하지만 여유는 자신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한다. 꺼내 쓰지 않으면 평생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 생을 마감하면 정말 근면하게 열심히 살다간 사람과 한량처럼 즐기다 간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전자는 칭찬이고 후자는 욕이다. 하지만 해석을 내 방식으로 하면 전자는 일만하다 죽은 사람, 후자는 자신을 위해 즐기고 간 사람이다. 소중하다는 소금·황금·지금 중에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지금인 오늘은 버린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오늘의 희생은 결국 미래까지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래는 오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60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 철저한 개인주의로 돌아가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인생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인생은 오직 한 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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